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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자장이 동으로 간 까닭

자장이 동으로 간 까닭 - 별들의 고향으로 하늘 아래 첫동네가 있는 곳 함백산 정암사

 

1.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금장지(禁葬地) 함백산(咸白山)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면서 흘러내리는 백두대간의 심장부이자 주릉선 상에 있는 함백산(咸白山)은 해발 1,572.3m로 정선 고한읍과 태백시 및 영월군 상동면을 경계로 뻗어있으며, 태백의 진산으로 삼국유사에 묘범산(妙梵山)이라고 기록돼 있다. 묘범산은 수미산(須彌山)과 같은 뜻으로 대산이며 신산으로 여겨 본적암·심적암·묘적암·은적암 등의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이 저술한 ‘산경표’에는 대박산(大朴山)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강원 동부의 최고봉이자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 설악산(1708m), 덕유산(1614m), 계방산(1577.4m)에 이어 남한에서 여섯번째로 높은 산이지만 정상까지의 포장도로가 개설되어 있기에 가족 산행지로는 제격인 산이기도 하다. 백두산에서 길을 떠난 백두대간이 오대산을 지나 태백산으로 가기전 솟구친 이 산은 이곳을 지나 화방재(어평재)로 굽어 내리다가 민족의 영산이라는 태백산(1567m)을 솟구친다. 그래서 함백산은 웅장하다. 함백산 정상에서 서로는 태백산(1567m)과 백운산1426m)을, 남으로는 두위봉(1407m)을, 북으로는 야생화의 천국인 천상화원 금대봉(1418m)과 국내에서 가장 세찬 바람골이기에 국내최대의 풍력발전소가 설치되어 있는 소위 '바람의 언덕'으로 불리우는 매봉산(1303m)등의 지역 전체를 굽어 조망해 볼 수 있으며, 또 동해 바다를 붉게 물들이면서 떠오르는 붉은 동해 일출의 장관을 볼 수가 있다.

정상에는 소백산과 더불어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된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간다'는 고산수목인 주목 군락이 있다. 특히 겨울산행시 설원에서 펼쳐지는 주목군락지의 사열은 장관으로 주목과 고사목에 핀 눈꽃이나 상고대가 추위조차 잊게 만들 정도로 절경을 자랑하기도 한다. 주릉이 동쪽의 태백시와 서쪽의 영월군 상동읍 및 정선군 사북면 고한읍 등 세 고을 읍면의 경계를 이루며 뻗어 있는 함백산의 산행 기점은 남한강으로 이루어지는 지장천의 상류인 두문동재(일명 싸리재)와 남한에서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 중 가장 높다는 만항재(1330m) 및 적조암 입구 등 3곳이며, 이 중 두문동재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등산로가 뚜렷하고 내내 조망이 시원해 보는 눈을 즐겁게 만들기도 하지만, 백두대간 산줄기를 한눈에 보면서 태백준령을 몸소 느끼고 싶다면 만항재로 오르는게 좋다.



(1) 국내에서 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땅 만항재


514km를 흐르는 큰 물 한강도 그 시작은 이처럼 미약한 ‘깊은 산속 옹달샘’이다. 백두대간 산봉우리인 금대봉 아래 깃든 한강발원지 검룡소.




해발 1330m의 이 고개는 백두대간의 함백산(1572.3m) 줄기가 태백산(1567m)으로 흐르다가 잠시 숨을 죽이는 듯한 형상의 지형으로 태백과 영월, 정선의 세 고을 경계다.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포장도로로 자동차로 올라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 만항재는 천상의 화원, 또는 산상의 화원이라 하여 야생화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매년 8월 초순이면 야생화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매년 축제 때면 마타리, 짚신나물. 동자꽃, 놋젓가락나물 등 그 이름조차 생소한 꽃들을 보기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여름철 이곳 고지(高地)에 부는 바람의 시원함은 코와 호흡기를 넘어 폐까지 정화시키는 느낌이 든다.

이곳에서 함백산 정상까지는 차로 오르는 방법과 지름 길인 등산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차로 오른다면 1,573m 고지를 땀 한 방울 안흘리고 올라 갈 수있고, 등산로를 이용한다면 1시간이면 충분히 올라 갈 수가 있다.

1,572.3m의 함백산 정상에서 보는 경관은 가히 환상적이다. 저 멀리 구름을 뚫고 우뚝 우뚝 솟아오른 우람하고 웅장한 태백산줄기가 환호성을 지를 만큼 절경을 이루어 내고 있고, 또 정상에는 집채만한 바위가 턱 하니 틀어박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바위 위에 서서 내려다 보면, 태백산으로 굽이치며 흘러 내리는 백두대간의 허리가 한눈에 들어 온다. 어디를 둘러 봐도 절경이 아닌 곳이 없고 봐도, 봐도 장엄함과 웅장함에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백두대간이 함백산으로 흘러내리기전에 솟구쳐 놓은 매봉산이 바람의 언덕으로 불리우듯이 이 산 또한 정상으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은 상상을 불허한다. 귀를 파고들어 고막을 찢을 듯 불어대는 바람 또한 선계(仙界)에 함부로 들어온 나약하고 연약한 인간을 꾸짖는 대자연의 호통처럼 느껴져 속세의 때가 쩔을대로 쩔은 중생의 가슴을 떨게 하기에 충분한 위용이 느껴진다. 아찔한 바위절벽 끝으로는 항상 사진작가들이 그 웅장한 백두대간의 허리를 작은 카메라에 담아내기에 여념이 없고, 그들 아래로 보이는 산 군데군데엔 살아서 기이하게 용틀임 하듯 몸을 틀고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주목들이 자신의 이름처럼 시선을 끌게 만든다.






만항재까지 가는 차도인 영월에서 태백으로 가는 국도 31호선과 정선에서 태백으로 가는 국도 38호선 길은 모두 자동차로 오를 수 있고, 이 두 국도를 잇는 길은 지방도 414호선이다. 하지만, 기왕지사 태백에 왔다면 이 길을 이용하기보다는 태백 시내에서 오르는 길을 추천한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 차량의 통행이 아주 적고, 또 길이 가파르고 굽어 있어서 약간의 모험심도 요구되지만, 운무가 피어오르는 이 길은 마치 천상으로 가는 천상도로 같아서 운치가 있다. 태백시내에서 만항재 고개로 오르는 입구인 스키장과 골프장을 갖춘 오투리조트 옆의 구절양장의 가파른 고갯길 끝에는 대한체육회선수촌 태백분촌이 있고, 거기서 좁은 산길로 조금만 내려가면 지방도 414호선을 만나고 그 아래 만항재가 있다. 만항재에 오르면 태백산을 비롯한 대간 산줄기와 주변 산악이 두루 조망된다. ‘산의 바다’가 유럽의 알프스에만 있지 않음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한다. 망항재에서 정선 쪽으로 2km쯤 내려오면 작은 마을을 만나는데, 바로 10여 년 전까지 광원들이 모여 살던 만항마을이고, 이 마을을 지나서 1km쯤 더 내려오면 국내 열목어서식지 남방한계선으로 유명한 천의봉 지장천계곡의 정암사가 나타난다.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이 천년고찰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국내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하나인 바,


트레커들이 금대봉 아래 안창죽(태백시 창죽동)의 이깔나무 숲속 눈길을 따라 ‘깊은 산속 옹달샘’인 한강 발원지 검룡소를 찾아가고 있다.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는다. ‘사리’라는 진신이 봉안됐기 때문인데 정암사에는 그 사리가 산 중턱 자장율사가 세운 수마노탑에 모셔졌다. 불가에서 신성시하는 보석 중 '수마노'라는 보석으로 만든 이 탑은 정암사의 가장 명당인 진혈처(眞穴處)에 세워져 있는데, 신기하게도 정암사를 굽어보면서 건너편 함백산에 천장지비(天藏地秘)되어 있는 28대 제왕지지(帝王之地) 천하명당을 직선으로 바라보고 서 있다. 이씨(李氏)의 조선왕조가 그들의 왕조를 뒤엎을 수 있는 왕기(王氣)가 서려 있기에 이곳에 묘지를 조성하지 못하게 금장지(禁葬地)로 묶어두는 것도 모자랐는지 아예 백성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던 곳이지만, 그렇게 금장지(禁葬地)로 묶어 두었던 이 땅도 이제 떄가 되어 서서히 본 모습을 드려내고 있다. 28대 제왕이 난다는 28대 제왕지지(帝王之地)인 이 땅은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비록 함백산 깊은 곳에 금장지로 묶여서 수 백년동안 꼭꼭 숨어 있었지만 이곳 수마노탑에 서서 함백산을 바라보면 옛 금탑이 묻혀있던 자리에서 황금색(黃金色)의 자기(紫氣)가 피어 오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리니, 이제는 누구나 쉽게 찾을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자장이 보석을 넣어서 탑을 세우고 혹 나쁜 사람들이 훔쳐 갈까봐 법력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는 금탑(金塔)과 은탑(銀塔)의 전설은 실제로 보석을 넣은 탑을 세운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제왕지지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참으로 좋은 땅이다. 당초 정암사터는 좋은 땅기운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금탑(金塔)과 은탑(銀塔) 및 수마노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 은탑과 금탑지는 찾지 못한체 이 두 탑을 굽어 보고 있는 수마노탑만이 수 천년을 말없이 서 있다.



이곳에서 자장은 말년에 그렇게 만나보기를 원했던 문수가 죽은 강아지를 담은 망태기를 들고 허름한 거렁뱅이 촌로로 분해서 나타났을 때, 한 눈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실수룰 저지르고 말았다. 처음 문수를 알아 보지 못한 시자들이 냄새나는 거릉뱅이 촌로로 분한 문수를 쫓아 버렸고, 급기야 문수와 시비가 붙어 곤란해진 시자들이 자장에게 "어찌 할 것인가?"를 물었고, 이 때 한 눈에 문수를 알아보지 못한 자장이 문수를 내치자, 문수가 홀연 죽은 강아지를 하늘로 던졌다. 하늘로 던져졌던 죽은 강아지가 사자로 변하자 이를 타고 하늘로 사라지면서 문수가 자장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 아만(我慢)과 아상(我相)에 사로잡힌자 진체(眞體)를 볼수없으리라"고,



팔십객인 자장이 이 말을 듣고 홀연 크게 뉘우치면서 문수를 쫓아 갔으나 자기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보기를 원했던 문수는 이미 하늘 저 멀리로 사라져서 보지 못하고 빈 하늘만 보고 돌아와서는 이내 몸져 누워 시름 시름 앓다가 열반을 한다. 이것이 5대 적멸보궁을 세우고 오대적멸보궁 중 마지막으로 정암사를 창건하면서 이곳에 눌려 앉아 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한 자장의 일생이니, 우리 모두 이 자장의 일생을 거울삼아서 자기를 돌아볼 일이다.



' 행여 아만과 아상에 사로 잡혀 진체를 보지 못하고 있지나 않은지'를

 

(2) 삼강의 발원지 삼수령(三水嶺)



백두산에서 기봉(起峰)한 백두대간이 백두대간의 중추 산줄기인 함백산(1573m)과 태백산(1567m)으로 오는 길목 매봉산으로 오르기 전에 반도의 생명수로 삼강의 발원지인 삼수령(三水嶺)이 있고 그 아래 고을 태백은 그 산만큼이나 신령하다. 반도의 생명수 삼강(三江: 한강. 낙동강. 오십천) 이 바로 이곳에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서해로 흐르는 한강, 남해로 나가는 낙동강, 동해로 흘러드는 오십천의 발원지인 삼수령은 빗방울 하나가 세 조각나 제각각 흘러 삼강을 이루어 국토를 적시고 있으니 이 어찌 신통한 땅이지 않는가? 그래서 옛부터 이곳에는 하늘나라에 살았던 빗물가족의 전설이 고스란히 녹아 남아 빗물처럼 흘러내려오고 있기도 하다.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던 백두대간의 거대한 산줄기가 태백산 어름에서 북에서 서로 방향을 틀 즈음 북에서 남으로 질주하는 낙동정맥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산줄기 하나를 뻗어 내린다. 대간(大幹)과 정맥(正脈)이라는 거대한 두 줄기의 대룡(大龍)이 만나 역(逆) ‘Y’자 모양의 지형을 이루니, 여기가 바로 세 강이 발원하는  삼수령(三水嶺)이다.



"산은 물을 가르지만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山分水而水不度嶺)"라고 지리서 ‘산경표(山經表)’를 통해 설파한 백두대간 개념의 정립자인 여암 신경준(1712∼1781·조선 후기 실학자)의 말 꼭 그대로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두 산줄기가 만나 기어코 품어낸 그 물은 세 갈래 산줄기에 감싸인 채 흘러내려 우리국토를 비옥하게 만들면서 우리민족의 젖줄이 되었다. 그 세 물길을 잉태한 함백산과 태백산의 신령함은 그를 두고 한 말이리라.



(3) 한강의 발원지로 감춰진 '깊은 산속 옹달샘'인 검룡소(儉龍沼)


산중턱에 세운 수마노탑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태백산 정암사의 적멸보궁. 자장율사의 주장자(지팡이)가 자라난 주목 아래 문수보살 동자상이 모셔졌다.




두 물이 하나로 아우러지는 정선 아우라지. 여기서 골지천을 거슬러 오르는 길은 태백시로 이어지는 35번국도인데, 이 길로 가다 보면 삼척, 태백 경계 지나 태백시내로 가는 길에 고개가 있으니 바로 해발 920m고개인 피재다. 바위표석에 ‘삼수령’(三水嶺)이라고 쓰여 있는 이곳이 바로 한강, 낙동강, 오십 천(삼척)의 발원지다. 이 곳은 남서진(南西進)하던 백두대간이 정서로 휘익 방향을 트는 지점으로, 여기에 낙동 정맥이 산줄기를 들이댄다. 대간과 정맥이라는 거대한 두 산줄기가 여기서 만나 형성된 세 계곡(溪谷)에서 제각각 발원한 물이 세 강의 원류가 되는 것이다.

이곳 피재에서 왼쪽 샛길을 따라 오르면 바람의 언덕이라는 매봉산 고랭지 채소밭 가는 길이고, 직진하여 국도 따라 4km쯤 내려가면 ‘검룡소’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잘 포장된 마을 길은 안 창죽을 지나 주차장까지 6.8km나 이어진다. 여기부터는 자연 생태 보전지역으로 검룡소까지 1.3km는  산림욕과 산책하기에 알맞다. 임도 따라 들어선 숲 길, 들꽃 피고 산새 울음소리 청아한 임도로 700m 쯤 걸어가면 폭 3m의 징검다리가 나타난다. ‘한강’ 최북단 다리다. 여기부터 600m는 이깔나무(낙엽송) 숲 터널의 오솔길이다. 내내 길옆을 흐르던 골지천은 시냇물로 졸아들어 졸졸졸 소리 내어 흐른다. 숲 터널 나와 조금만 더 오르면 검룡정 육각정이 보인다. 정자는 비스듬한 경사의 거대한 암반 옆에 있다. 암반 오른 편 끝에서는 골지천으로 흘러드는 물이 힘차게 흐른다. 억겁 세월 물 흐름에 바위는 깊게 패어 있다. 그 물길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멋진 10단 폭포다. 폭포 아래는 용소도 있다. 이 폭포 꼭대기에 검룡소가 있다.

검룡소는 샘의 바위 구멍 안은 조각난 검은 돌 뿐인 폭 1, 2m의 원형 연못으로 삼강 중 으뜸인 한강의 발원지이자 514.4km로 유장하게 흐르는 한강 물줄기가  비로소 시작되는 곳이다. 금대봉(1418m) 아래 해발 900m쯤의 산중턱 속에 감춰진 이 '깊은 산속 옹달 샘’은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그리고 한결같이 섭씨 9도를 유지하는 물이 하루 2000t씩 용솟음친다. 수면을 보면 아주 희미한 동심원의 파형이 어른거려 물이 샘솟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깔끔한 물 맛을 자랑하며, 한 모금 마시면 한강을 통째로 들이킨 기분이 들게 하지만, 거대한 한강이 이렇듯 예쁜 숲 속의 옹달샘에서 솟는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특히 겨울 검룡소 가는 길은 눈 세상 태백의 운치가 한껏 풍겨 나는 멋진 설경 산책로가 된다. 아이들 손잡고 마냥 걸어도 즐겁고 편안한 눈길 트레킹 코스로 주차장부터 징검다리까지의 700m는 양지 녘이고 징검다리 건너면 수 십m 큰 키의 낙엽송 숲을 통과하는 눈길이 열린다. 숲 터널을 나서면 금대봉과 대덕산(1307m) 아래 눈 계곡이 옆으로 펼쳐지고 금대봉 아래 안창죽(태백시 창죽동)의 이깔나무 숲속 눈길이 지나 온 저 뒤로 보인다.

그래서 봄부터 가을까지 연출되는 이끼 낀 바위 타고 열 번이나 추락을 거듭하는 멋진 흐름을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신비로운 모습은 손상되지 않는다. 근래 태백시는 샘의 훼손을 막기 위해 관람대를 가설했다. 만약 태백 시내에서 출발했다면  검룡소로 가는 도중(국도 35호선)에 피재(920m)를 넘는데 이곳이 바로 위에서 설명한 세 강의 발원지인 삼수령이기도 하다.

 


2 자장(慈藏)의 아상(我相)이 드러난 절 정암사(淨巖寺)



-  명예·권력 뿌리치고 수행정진하던 젊은날 초심 찾아 창건한 절이지만, 아상(우월감으로 남을 업신여김)때문에 깨달음 실패한 자장이 남긴 부처 진신사리 모신 적멸궁엔 부처상 대신 빈자리만 남아 반면교사하고 있다.



정선군 화암면(畵岩面) 함백산 천의봉 아래 지장천 계곡의 품에 안긴 정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 서기636년(신라 선덕여왕 5년)에 자장(慈藏)율사가 당(唐)나라에 들어가 문수도량(文殊道場)인 중국 산시성[山西省] 청량산 운제사(雲梯寺)에서 21일 동안 치성을 올려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하고, 석가의 신보(神寶)를 얻어 귀국한 후 전국 각지 5곳(오대산 중대,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영취산 통도사,함백산 정암사)에 이를 나누어 모셨는데, 그 중 한 곳이 바로 이 절이었다고 한다. 신보는 석가의 정골사리(頂骨舍利)와 치아사리 및 가사 ·염주,  불지질 불장주 패엽경(貝葉經) 등의 간자(簡子) 인데, 지금도 사찰 뒤편 천의봉(天衣峰) 중턱에 남아 있는 보물 제410호인 수마노탑(水瑪瑙塔)에 봉안되어 있다고 하여, 법당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절은 1713년(숙종 39) 중수했는데 낙뢰로 부서져 6년 뒤 중건하였고, 최근에 새로 두세 차례 중건하였다. 이 사찰의 지장천 계곡에는 천연기념물 제73호인 정암사열목어서식지(淨巖寺熱目魚捿息地)도 있다. 무마노탑은 자장율사가 정암사(淨巖寺)를 창건한 7년 후인 선덕여왕 12년 동해용왕으로 부터 초청을 받아 용궁에 갔을 때 동해 용궁에서 가져온 마노석(馬瑙石:마치 말의 뇌같다고 해서 마노라 함)으로 만든 보물 제410호인 전탑(塼塔)이다. 자장율사가 수마노탑을 조성할 떄 각종 보물을 넣어 두기위한 금탑(金塔)과 은탑(銀塔)도 함꼐 조성하였는데 물욕(物慾)에 눈먼 후세인들이 보물을 훔쳐갈것을 두려워 하여 법력으로 이를 숨겼다고 하는데, 이는 실제로 이같은 보탑을 지었다가 보다는 아마도 조선왕조에서 금장지로 지정한 28대 제왕지지(帝王之地)를 지칭한 것으로 생각되며 현재의 지장천 계곡 위일 것이다. 적멸보궁 가는 길목에는 자장이 평소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두었는데 그 속에서 새싻이 나서 자라고 있는 주목나무도 있어 여러가지를 생각케 만든다.



(1) 자장(慈藏)이 함백산 천의봉 지장천 계곡으로 간 이유?

신라가 삼한을 통일하기 전 인물인 무림(茂林)은 귀족인 진골(眞骨) 출신으로 소판(蘇判)이라는 높은 관직에 있었다. 하지만 늦게까지 아들이 없자, 관세음보살상 앞에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축원했는데, 기도가 통했을까, 그의 아내는 별이 떨어져 품 안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고 이듬해 석가모니의 탄생일인 4월 초파일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신라 3대 고승(高僧)이자 대부분의 국내 사찰을 창건했다는 세 분 고승인 자장, 원효, 의상 중 한 분인 자장이다. 자장은 일찍 부모를 여읜 뒤, 홀로 깊은 산에 들어가 수행에 전념했다.

조그만 집을 가시덤불로 둘러막아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가시에 찔리게 하였고, 끈으로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정신의 혼미함을 물리칠 정도로 치열하게 구도정진했다. 당시 신라의 임금은 재상의 자리가 비어 그를 기용하려 했으나 부름에 응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불교가 전래된 초기라 아직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던 시절임을 감안하여 자장은 계법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636년(선덕여왕 5) 당나라로 건너간다.

중국의 산서성 청량산 운제사에서 명상수행하던 중 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을 만나 동북방 명주(明州 : 신라 때 강릉의 옛 이름)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라는 말과 함께 진신사리를 받는다. 문수의 부촉을 받은 자장이 선덕여왕의 부름으로 7년 만에 귀국한 후 오대산 중대와 설악산 봉정암 및 영취산 통도사에 사리를 봉안하면서 불교의 토대를 닦으려 애썼다. 또한 불법을 널리 알리고 교단의 기강을 바로 잡아, 당시의 국난을 극복하면서 분열된 삼국을 통일하고자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고, 출가 승려를 위해 통도사를 세웠다. 왕실과 귀족은 물론 속인들마저 존경해 승려로서는 최고의 위치인 대국통이 되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자장은 말년에 모든 명예와 권세를 뒤로 하고 지금의 강릉으로 갔는데, 그 자세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문수보살을 다시 친견하고자 오대산에서 용맹정진하던 중 하루는 꿈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나를 보려면 태백산 갈반지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자장은 제자들과 함께 곧바로 태백산을 찾았다. 자장일행이 태백산 여기저기를 더듬다 보니 칡덩굴이 무성한 곳에 큰 구렁이들이 나무 아래 서로 얽혀있는 것을 보고,그곳을 갈반지라 여겨 645년 정암사(옛 이름 석남원)를 지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정암사에 머물며 문수보살을 기다리던 자장 앞에 어느 날 다 떨어진 옷을 입은 거지 늙은이가 죽은 강아지를 삼태기에 싸들고 와 자장을 만나겠다 했다. 냄새나는 남루한 차람의 거지 노인은 제자들에게 대뜸 "자장을 보려 내가 왔다"고 전하라 했다. 웬 냄새나는 거지 노인이 대국통이자 국사로 추앙받는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니 제자들은 기가 막혔다. 그래서 노인의 앞을 가로 막으면서 온 나라에서 감히 스승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미치광이가 아니냐고 큰 소리로 호통을 쳐 내쳤다. 그래도 가지 않고 자장을 찾자, 곤란해진 시자들이 자장에게 "어찌 할 것인가?"를 물었고, 이 때 한 눈에 문수를 알아보지 못한체 미친 사람이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자장이 거지 노인을 내치자, 거지 노인이 탄식하면서 삼태기에 싸여있던 죽은 강아지를 하늘로 던졌다. 하늘로 던져졌던 죽은 강아지가 홀연 사자로 변하자 이를 타고 환한 빛을 뿜으며 푸른 하늘 저 멀리로 사라지면서 문수가 자장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 그토록 보고자 염원하기에 내 이렇게 직접 찾아 왔거늘 아만(我慢: 교만한 마음)과 아상(我相: 남을 업신 여기는 마음)에 사로잡힌 자가 어찌  나(眞體)를 볼 수 있겠느냐?" 고.



그 냄새나는 늙은 거지가 바로 문수보살의 화신이였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깜짝놀란 팔십객인 자장이 홀연 크게 뉘우치면서 방에서 뛰어나와 빛줄기를 따라아 바로 뒤를 쫓아 남쪽 고개까지 달려갔으나 자기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보기를 원했던 문수는 이미 푸른 하늘 저 멀리로 사라져서 온데간데 없고 허공으로 변한 빈 하늘만 보고 돌아와서는 이내 몸져 누워 시름 시름 앓다가  얼마 후 바로 열반을 한다.



자장은 이미 두번이나 문수보살을 만난 적이 있으니, 선입관 때문에 그 거지 늙은이가 문수보살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혜안(慧眼: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의미이고, 자장이 깨달음을 얻는데 실패한 이유는 선입관에 근거한 '아만(我慢:)과 ‘아상(我相)’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5대 적멸보궁을 세우고 오대 적멸보궁 중 마지막으로 정암사를 창건하면서 이곳에 눌려 앉아 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한 자장의 일생이니, 우리 모두 이 자장의 일생을 거울삼아서 자기를 돌아볼 일이다.

' 행여 아만과 아상에 사로 잡혀 자기 앞에 있는 진체(眞體)를 보지 못하고 있지나 않은지'를



정암사는 자장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자, 말년에 일생을 마친 곳이다.

   


그런데 율사와 대국통으로 권력의 핵심에 있던 자장이, 이 산골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진정한 이유야 자장만이 알고 있겠지만, 당시의 상황을 유추하여 보면 대충 이렇다.

당시 신라 왕실은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선덕여왕은 성골이었지만 여왕이라는 이유로 통치력에 불신을 받았고, 외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밀려 수세에 몰려있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중국의 선진문물을 도입하여 난국을 벗어나려는 불교치국책을 실시했다. 국민을 한데 모을 통치철학과 통치이념이 필요했는데, 그녀는 그것을 불교에서 찾았고, 그 덕분에 당나라를 다녀온 자장은 핵심 인물이 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강력한 신진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김춘추와 김유신의 견제를 받았다. 이 신진세력은 당 태종의 '정관의 치'를 모델로 하는 유교치국책을 지향했고, 진덕여왕을 거쳐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면서 자장은 정치적으로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정권이 교체되었으니 구주류는 주류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삼한을 통일한 신진세력에게는 새로이 병탄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을 아우르는 새로운 통치이념철학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새로운 통치이념철학이 바로 우주 삼라만상 모두는 똑같은 불성이 있기에 같은 부처이므로 삼라만상을 통합된 하나로 보는 화엄종이였다. 여기에 기독교에 구약과 신약이 있는 것처럼 불교에도 구역과 신역이 있는데, 당시 당나라에서는 불교의 한문 경전에 오류가 많아 부처님의 본 뜻을 훼손했다며 구역(舊譯)을 부정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번역본인 신역(新譯)이 나오면서 일세를 풍미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구역불교의 마지막 세대였던 자장의 활동에 제동이 걸린 반면, 신역불교를 받아들인 원효와 의상은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말하자면, 불교계에도 세대교체가 일어난 셈이다. 이같은 연유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자장율사는 하루아침에 권력과 명예를 잃게 되었고, 힘을 잃은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그렇게 많지 않았으리라고 보여진다. 그래서 그는 ‘초심(初心)’을 선택했다고 생각된다. 젊은 시절 왕의 부름도 무시하면서 명예도 마다 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정진 했던 그때처럼 근본으로 돌아 가고자했을 것이다. 그래서 찾은 곳이 지금의 태백산 정암사다. 비록 ‘아상’ 때문에 거지 늙은이로 변한 문수를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함으로써 궁극적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으나,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그의 선택은 여러가지면에서 최고이자 최선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우리는 때때로 대단한 부와 명예를 가진 분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진흙탕 싸움을 벌이거나 편법과 탈법을 동원해 무리수를 두는 것을 보게 된다. 더 얻기 위한 욕심이고, 더 오래 누리고 싶은 과욕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손가락질 해도 본인만 모르는 것 역시 ‘아상’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마음이 있으니, 보고 싶은 것만 보이는 것인데, 최고의 자리에 있었으나 초심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자장이 이를 보면 무어라 할까.




   
▲ 정선 정암사 선장단 (자장율사 지팡이).



(2) 초심(初心 : 첫 마음)을 찾게 해주는 절 정암사(淨巖寺)


자장율사의 입적 후 정암사는 역사에서 천년 동안 드러나지 않는다. 중앙 정치에서 배제된 자장이 창건한 절이라는 시대 배경을 탓할 수도 있겠으나, 지리적인 특성이 우선인 듯 싶다. 해방 전만 해도 영월에서 200리를 걸어야 올 수 있었고, 호랑이를 만날까 두려워 이곳에 임명받은 관리도 지나길 꺼렸던 오지 중의 오지이니 당연한 일이였을터이고, 그만큼 수행자들에겐 비밀스런 명당이였기에 자장율사도 이곳을 찾은 것이리라. 이같이 심산유곡 속에 묻혀있던 정암사가 일반에 알려진 건은 1948년 함백광업소가 문을 열면서부터다. 교통이 발달한 지금은 도로변에 위치해서 마음만 먹으면 전국 어디서든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사찰이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큰 맘 먹지 않으면 다녀 가기가 쉽지 않는 곳 중 하나였다.



정암사 산문에 들어서려니 문득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아지리라라는 얘기가 떠오른다. 정암사에 얽힌 자장율사의 연기설화(緣起說話)는 어쩌면 이 뜻을 일깨우기 위해 지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아만(我慢: 교만한 마음)에 빠진 수행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참 도(道)에 이르는 가장 바른 길은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에 있다. 그래서 어느 선지자는 스승이 되려하지 않고 만물을 스승으로 섬기는 이들이 새 시대를 연다고도 했다. 정암사는 고한에서 상동, 현리로 가는 큰 길가에 자리잡고 있으나 찾는 이가 많지를 않다. 그래서 조용히 틀어앉아 한철 수행하면서 초심을 찾기에 아주 좋은 도량이다. 함백산 천의봉 자락에 싸여 있는 사역에 들어서면 신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불교문화의 장엄함과 자장의 초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암사라는 이름은 “수마노탑이 있어 비로소 사십팔방지처가 열리고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니…. 정암사라 하노라”라고 하였듯이 세속과 인연을 끊고 정결하게 이곳에 수행하라는 뜻으로 정암사라고 지었다고 하는데서 보듯이 정암사의 淨자는 '맑고 깨끗하다. 사념이 없다는 뜻'이고, 높고 큰 바위 바위巖자 역시 '바위처럼 흔들림없는 마음'을 나타내는 사명에서 보듯이 이곳은 속세와 인연을 끊기 위해 보통 작심하지 않고는 들어 갈 수 없는 절인 것이다. 그래서 1858년 적멸보궁과 1874년 수마노탑을 중수할 때 시주자가 보통 평신도들인 다른 사찰과는 달리 대부분 전국 각지의 출가 수행자였던 점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는 바, 이 절은 일반 신도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출가 수행자들 사이에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 성소(聖 所)로 인식되고 있다.
정암사가 왜 수행자들의 성소로 인식되고 있을까? 오지 중의 오지로 혼자 있으라고 하면 무서워 단 하루도 견디기 힘든 적막한 곳 이긴 하지만, 아마도 수행자들이 한번 들어오면 세속의 연을 끊고 수행에 전념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잘 갖춰진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같은 연유로 현대에 들어와서도 일제시대 현직판사를 그만두고 총독부의 집요한 주시를 피해 이곳에 3년 동안 머물며 수행 정진한 효봉(曉峰)스님과 해방 후 지월(指月), 서옹(西翁)스님이 이곳을 거쳐 가는 등 출가인의 수행 처로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가면 다른 절에서 느끼지 못한 이 절만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다. 그래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 풍수학적으로 살펴보면, 요사채에서 보면 축간방(丑艮方 : 동북방)에 귀인처럼 생긴 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아 올랐다. 주산이 축간방에 있으면서 수려하면 훌륭한 도인들이 나오게 된다. 정암사에서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수마노탑 자리가 가장 좋다. 수마노탑 바로 건너편에는 반쯤 피어난 연꽃처럼 생긴 봉우리가 둥그렇게 솟아 있다.수마노탑에서 미곤방(未坤方: 서남방)에 있는데 풍수학에서는 이 방향에 아름다운 봉우리가 보여도 또한 훌륭한 도인들이 나온다고 한다. 이 봉우리가 축간방에 있는 귀인봉과 잘 어우려져 있으니, 수마노탑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그 기운이 전해져 소위 기도발이 잘 받을 것이다.

정암사는 5대 적멸보궁답게 대웅전이 없고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 항상 머물러 계시는 궁전’이라는 의미로, 수미단에는 불상이 없고 방석만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기 때문인데, 부처의 진짜 몸이 있으니 따로 상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이곳이 아닌 적멸보궁 뒤편 수마노탑에 봉안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수마노탑에서 기도를 하면서 탑돌이를 하면 좋은 기감이 느껴진다는 것이 스님의 조언이지만, 이는 부처의 진신사리 힘이라기 보다는 풍수적으로 볼 때, 이 수마노탑 자리가 바로 함백산의 정기가 내려와 몽쳐진 곳이기 때문이다. 수미노탑 맞은편에서 보면 함백산의 모든 정기가 이 자리로 흘러드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때문에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기도발이 잘 받을 것이다.

게다가 수마노탑에서 보는 풍광이 장관이다. 100m 남짓, 7~8분을 올라왔을 뿐이지만 워낙 고지대라 태백산맥의 산줄기가 한 눈에 보인다. 자장율사가 수마노탑을 만들면서 금탑과 은탑도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다지만, 이곳에서 보면 바로 맞은편 함백산 자락에 28대 제왕지지 명당에서 뿜어올라오는 자황색 지기를 뚜렸하게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자장이 후세 중생들의 탐욕을 우려해 신통(神通)을 부려 안 보이게 했다는 금탑과 은탑은 보물을 묻어둔 실제의 탑이 아니라 바로 이 명당자리를 말하는 것이리라.



정암사 앞에는 함백산 안품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이 쉼없이 흐른다. 이 물살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깊은 계곡이 나오는데 바로 정암사계곡이라 불리우는 열목어가 사는 지장계곡이다. 함백산이 조선왕조의 금장지였기 때문에 정암사가 자리잡고 있는 천의봉 지장계곡은 훼손되지 않고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 있는 관계로 봉화 백천계곡의 열목어 보호지와 함께 천연기념물 제73호인 열목어의 남방한계선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같은 열목어서식지인 까닭에 이 사찰 계곡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열목어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데, 이 열목어도 몇 년 전부터 이상 기후 때문에 수가 크게 줄었다고 해 걱정스럽다.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는데 왜 난 늘 사는 게 힘들까?'하고 한숨 날 때가 있고, 또 '바르게 산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내 판단이 옳은 것일까?' 하고 의문이 생길 때도 있다. 이같이 나를 돌아보고 만나야 할 필요가 있다면, 정암사를 찾는 것은 어떨까? 1300년의 시간을 넘어 자장율사를 만나고, 그와 더불어 초심을 되새겨보는 것도 좋으리라. 불자가 아니더라도 잠시 번잡한 일상을 내려놓고, 나를 돌아보기에 좋은 공간인 정암사는 요란하지 않고 소박하지만 따뜻하고 경건한 절집이다. 하지만, 이 절에 사는 사람들은 함백산의 웅장한 기운을 닮아서 강직하고 거칠다. 심지어 공양주보살까지도. 이점에서 사람은 역시 땅의 기운을 닮아가는가 보다.

(3) 재앙을 막아주는 힘 - 서해용왕에게서 받은 ‘마노석’으로 쌓은 수마노탑



   


정암사하면 누구나 자장이 창건한 5대 적멸보궁을 떠올린다. 때문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참배하고자  전국의 출가 수행자들과 재가 신도들이 많이 찾아온다. 여기에 고즈넉하고 조용한 곳을 찾고자 하는 일반인들도 함께.

그런데, 유독 정암사는 일반 관광객들 보다 신도들이 더 많이 찾는다. 이유는 진신사리 참배가 아니라 수마노탑에 기도를 하면 재앙을 막아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암사 경내를 지나 좌측 전나무 숲 속으로 수십 계단을 올라가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수마노탑이 적멸보궁을 내려다 보면서 조용히 서 있다. 그래서 수마노탑에 올라 정암사를 내려다보는 것은 꼭 한 폭의 그림 같다.

탑 밑에 다가가 탑의 가장 높은 곳을 보기위해 찰주를 쳐다보니 현기증이 나 뒤로 넘어질까 무서웠다. 왜 이렇게 높은 곳에 탑을 세웠을까? 석가탑이나 다보탑처럼 경내에 세워도 될 것을 탑을 쌓기 위해 이곳으로 돌들을 지고 날랐을 일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온다.

수마노탑은 돌을 벽돌처럼 잘라서 쌓은 7층 석탑(模塼石塔)으로, 기단부는 평면이 점점 좁아지게 화강암 6단으로 쌓았고, 그 위에 회록색을 띠는 석회암 벽돌을 2단으로 쌓아 탑 몸체부를 받치고 있어, 마노석 하고는 상관없는 석회암 탑이다. 그런데도 왜 수마노탑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자장이 정암사를 짓고 7년 후에 수마노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지금의 수마노탑은 고려시대에 세웠을 것으로 짐작한다”라고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사나 마노석이 섞여 있나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마노석은 보이지 않고 벽돌에 새겨 놓은 이름과 구호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 탑에 와서 기원을 하면 재앙을 막아준다는 소문이 나서 방문자들이 표시를 해놓고 가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별로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마노(馬瑙)는 예로부터 재앙을 예방하여 준다고 알려져 온 석영질의 보석으로 원석의 모양이 말의 뇌수를 닮았다고 하여 ‘마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 안내판을 보고서야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7층 석탑을 왜 수마노탑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마노를 칠보(七寶) 가운데 하나로 여겨 소중하게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 재앙을 예방한다는 생각에 조선시대에는 마노가 장신구와 장식품에 널리 이용되어 남자용의 풍잠(風簪)을 비롯하여 갓끈 그리고 비녀·가락지·노리개·향집·장도 등에 장식하였다는 기록과 불가에서는 마노를 칠보(七寶) 중 하나로 생각하여 신성시 하고 있는 점을 봐서 그냥 7층 석탑으로 불리는 것 보다 수마노탑이라고 불리게 함으로서 일종의 신비적인 탑으로 생각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안내판에는 ‘자장이 당나라 청량산에 들어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본국으로 귀국한 7년 후(서기 643년) 동해용왕이 자장율사의 불도에 감화되어 법문을 듣고자 용궁으로 초청을 하였고 용궁에 들어가서 용왕으로부터 마노석을 받아와 쌓아 올린 탑이라 하여 수마노탑이라 불렸다’고 하여 수마노탑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를 설명하지만, 마노탑이 재앙을 예방하여 준다고 믿기 때문에 그 의미로 자장의 용궁이야기를 가미해 수마노탑으로 부르게 된 것이리라.



통상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는 인법당(人法堂)이다. ‘사리’라는 진신이 봉안됐기 때문인데 정암사에는 그 사리가 산 중턱 자장율사가 세운 수마노탑에 모셔졌다. 불가에서 신성시하는 보석 중 '수마노'라는 보석으로 만든 이 탑은 정암사의 가장 명당인 진혈처(眞穴處)에 세워져 있는데, 신기하게도 정암사를 굽어보면서 건너편 함백산에 천장지비(天藏地秘)되어 있는 28대 제왕지지(帝王之地) 천하명당을 직선으로 바라보고 서 있다. 이씨(李氏)의 조선왕조가 그들의 왕조를 뒤엎을 수 있는 왕기(王氣)가 서려 있기에 이곳에 묘지를 조성하지 못하게 금장지(禁葬地)로 묶어두는 것도 모자랐는지 아예 백성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던 곳이지만, 그렇게 금장지(禁葬地)로 묶어 두었던 이 땅도 이제 떄가 되어 서서히 본 모습을 드려내고 있다. 28대 제왕이 난다는 28대 제왕지지(帝王之地)인 이 땅은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비록 함백산 깊은 곳에 금장지로 묶여서 수 백년동안 꼭꼭 숨어 있었지만 이곳 수마노탑에 서서 함백산을 바라보면 옛 금탑이 묻혀있던 자리에서 황금색(黃金色)의 자기(紫氣)가 피어 오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이제는 누구나 쉽게 찾을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자장이 보석을 넣어서 탑을 세우고 혹 나쁜 사람들이 훔쳐 갈까봐 법력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는 금탑(金塔)과 은탑(銀塔)의 전설은 실제로 보석을 넣은 탑을 세운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제왕지지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참으로 좋은 땅이다. 당초 정암사터는 좋은 땅기운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금탑(金塔)과 은탑(銀塔) 및 수마노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 은탑과 금탑지는 찾지 못한체 이 두 탑을 굽어 보고 있는 수마노탑만이 수 천년을 말없이 서 있다.



진신사리를 봉안한 수마노탑 아래의 인법당이 있는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목에 정암사 선장단이 조성되어 있고, 그 중앙에 마치 고다마 싯달다가 득도하였다는 보리수 나무형상으로 싱싱하게 자란 주목과 죽은 가지에서 다시 새롭게 살아 난 새 가지가 신비로움을 전해주고 있는데, 자장율사가 신표(信表)로 남긴 주장자(지팡이)가 자라 이 주목이 됐다는 사연이 나무 아래에 적혀 있다. 그래서 자장이 평소 짚고 다니던 죽어 말라비틀어졌던 주장자(禪杖: 지팡이)가 새로운 생명을 받아서 싱싱하게 자라났다는 이 주목 한 그루가 덧없는 옛 세월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을뿐만 아니라, 죽은 가지에서 새롭게 자라난 이 주목은 1300여 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자장율사의 일화 중에 한 가지 더 재미 있는 것은 정암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정선 태백의 이 산골에 하얀 세상 열리리라" 했다던 그 예언이 현재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이 말은 바로 얼마전에 개장한 하이원스키장(정선군 고한읍)과 오투리조트를 염두에 둔 말로서, 근래 이곳에 하이원 스키장과 태백 서학골에 오투리조트 스키장이 들어섰으니 선인의 신통력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고 이곳 태백산에서 매년 겨울 열흘간 태백산 눈축제가 열리고 있으니 이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