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동창회 홈피에 게재된 대선배님의 글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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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운선 박사가 다움의 동호회 방에 올린 글인데 참 실감이 나서 여기 가져왔습니다
자기가 경험한 6.25의 경험담임니다
안운선 박사의 대화명이 老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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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 전의 6월을 회고하며
나는 지금으로부터 61년 전인 1950년에 큰 희망을 품고 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위대한 과학자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당시에는 고등학교 정도의 학력만으로도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었고, 실제로
나는 은행에 취직까지 된 상태였는데도 이 꿈 때문에 대학엘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6.25사변이 일어나고 세상이 뒤집혔다. 사변이
일어난 그 해 6월 25일은 맑게 갠 초여름의 일요일이었는데, 아침부터 먼
천둥과 같은 불길한 대포 소리가 들리더니, 공산군이 38선 전역에서 쳐들어오고
있다는 방송이 나왔다. 입학식을 올린 지 한 달도 안 되어(학제 변경으로 이
해에는 6월이 학년 초였다), 미처 대학의 분위기를 느끼기도 전인데 무서운 전쟁
부터 체험하게 된 것이다. 수십만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또 온 나라가 초토화되는 상상도 못 할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인민군은 침공 3일 만인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하였는데, 우리 정부는 그 전날
밤까지도 시민들에게 안심하라고 하더니 황망하게 한강 다리를 끊고 시민들을
남겨 논 채 요인들만 한강을 넘어갔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우선 병원들을
접수하고 인민군 부상병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입원해 있던 국군 부상병들을
모조리 살해하였다. 서울대학교 병원 앞마당 도랑 안에는 이렇게 살해한 수많은
국군 병사들의 시체를 묻지도 않고 쌓아놓아, 악취가 주위에 진동하였다. 민간인
환자들을 어떻게 했는지까지는 모르겠는데, 가히 추측을 하고도 남을 일이다.
이들은 또 식량을 비롯한 모든 생필품을 징발하였으며 시민들이 아사하는 것은
전혀 신경을 안 썼다. 핍박받는 남한 동포를 구한다면서 쳐들어온 김일성의
붉은 군대는 이러한 짐승과 같은 끔찍한 짓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길이나 학교나 직장에서 강제로 끌어다 인민군에 집어넣고, 막바지에는 동넷집
들을 한 밤중에 샅샅이 뒤져서 잡아갔다.
나는 서울 토박이라 피난 갈 곳이 없어 서울에 남았는데, 공산치하에 들어간
지 미처 하루도 못 지나서 빨갱이들이 나를 잡으러 왔었다. 혁명 대열에 동참
하지 않고 학교에만 다녔으니 반동 지식층에 속한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천만
다행으로 나는 이때 무슨 소식이라도 들을까 하고 학교엘 갔었다. 나는 그제야
월남한 친구들한테서 들은 이북 이야기가 실감이 났다. 그리고 화를 피해 7월1일
새벽에 혼자서 뒤늦은 피난길에 나섰다. 몸에 아무 것도 안 지닌 체, 주머니에
돈을 조금 넣고 소풍이라도 가는 듯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는데, 지금 생각
하면 너무나 무지한 피난 차림새였다.
먼 길을 걸어본 경험이 없는 데다 어찌나 더웠는지 얼마 걷지 않아서 목이
마르고 다리가 아프기 시작하였으며, 나무 그늘만 있으면 주저앉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길에는 뒤늦게 피난길에 나선 사람들이 많아 갈증이나 더위에
대처하는 방법 등 먼 길을 걷는데 필요한 요령을 가르쳐 주곤 하였다. 또 길가
에는 인민군이 몰고 내려온 수없이 많은 육중한 탱크와 트럭들이 비행기의 폭격
으로 파괴된 채 뜨거운 햇볕 아래 나뒹굴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날아왔다 한참
지나간 다음에야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그렇게 빠르고 무서운 비행기를 생전
처음 보았다.
점심때가 되어 시장기가 돌기 시작하는데, 음식점은 모두 문을 닫았고, 도로변
에는 빈 집들만 보였다. 음식을 사 먹을 데가 전혀 없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빈 집에 들어가 아무것이라도 뒤져 먹었을 것 같은데, 그때는 그런 배짱이
없었다. 사람들이 있는 집은 길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고, 저녁에는 인심
좋은 농가를 찾아들어가서 밥을 얻어먹고 처마 밑에 앉아 밤이슬을 피했다.
방방이 피난 온 친척들로 꽉 찼고, 부엌에도 사람이 꽉 찼으니 별 도리가
없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고생이었다.
다음 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이런 고생을 하면서 걸어 기진맥진한 상태로
안성에 있는 외삼촌 집까지 갔다. 전선이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이 전선을
뚫고 내려가는 것은 자신이 없어 당분간 이곳에 머물기로 하였다. 그런데
전선이 멀리 남쪽으로 내려가니까 조용했던 이 시골 마을에도 좌익 세력이
조직화되었고, 이곳은 더 이상 피난처가 못 되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국
죽더라도 집에 가서 죽어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8월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날 집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그 다음
날부터 설사를 시작하였고, 발바닥에는 물집이 생기기 시작하여 정말 걷기가
힘들었다. 이런 상태로 걷다 보니 어떤 날은 종일 걸어도 10km를 못 갔다.
그런데 길목마다 완장을 두른 빨갱이들이 지키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의용군에 보내거나 처형을 하였다. 저승사자보다도 더 무서운 빨갱이
들이었다.
저녁때가 되어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하룻밤 재워줄 것을 부탁했었는데,
돈은 정말 위력이 없었다. 그래도 가는 곳마다 인심이 후한 집이 있어 밥도
얻어먹고 잠도 잘 수가 있었다. '죽으란 법은 없다'라는 속담이 이래서 생겼을까
싶었다. 하루는 첩첩산중의 한 시골집 사랑방에서 자게 되었는데, 꾀 늦게까지
동네 청년들이 놀다 갔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깨우
더니 빨리 동네를 떠나라는 것이다. 날이 밝으면 엊저녁의 그 청년들이 나를
잡으러 올 것 같다는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무도한 일이 있을까 생각
하며 도망쳤던 적도 있었다. 나는 후에 이 아주머니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이 두메산골 마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면서 마침내 말죽거리까지 왔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나룻배를 타고 칠흑 같은 밤에 강을 건너, 집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내가
길에서 의용군에 붙들려가지 않은 것이 조상님들의 보살핌 때문이라며 날
붙들고 눈물을 흘리셨다. 의용군에 보낼 청년을 필사적으로 사냥하고 있는
거리를 태연하게 걸어서 무사히 집에 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나는
이때부터 9월 28일까지 한 달 이상을 뒷방에 숨어서 지냈다.
나는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많은 주위 사람들이 이
석 달 동안에 참변을 당했다. 그중에서 특히 나의 중학시절 체육 선생님은 참으로
기막힌 참변을 당했다. 사변 전에는 공산 세력의 학원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서
전국의 체육교사들을 예비역 소위로 임명해 놓았었는데, 우리 체육 선생님은
자신을 체육선생으로만 생각했지 군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태연히 어린애를 안고 학교 마당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 그런데 이 선생님을
본 좌익 학생 하나가 교문 밖으로 나가 지나가던 인민군을 데리고 왔다. 무엇
이라고 밀고를 했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여하튼 이 인민군은 체육 선생님을 붙잡아
교정 한 구석에 세워놓고 총살을 하였다. 부모처럼 모셔야 할 선생님을 이렇게
처참하게 죽이는 만행을 태연히 저지를 수 있는 것이 바로 빨갱이다.
이제 이러한 끔찍한 이야기는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앞으로 얼마 안 가서 완전히
잊혀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북에서 김정일 도당은 툭하면 도발을 해오고, 목전의 이익에
눈이 뒤집힌 정상배들과 철없는 젊은이들은 벌써부터 도를 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데 제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다.
2011. 6. 2 老 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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