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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영남의 젖줄 낙동강이 빚어낸 3대 물돌이동(洞) 중의 하나이자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인 영주 무섬

 

1. 내성천(乃城川)이 빚어낸 풍수적(風水的) 길지(吉地)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은 그 상류에 기막힌 경관을 자랑하는 물돌이 마을을 빚어 놓았으니 소위 낙동강이 빚은 3대 물돌이동(洞)이다. 태백산과 소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의 최상류인 내성천(乃城川)은 영주에 이르러 350도로 휘감아 돌면서 마치 물위에 떠있는 섬같은 지형을 빚어 놓으니 바로 무섬마을(水島里)이다. 이어서 이 내성천은 하회에 이르러 300도로 휘감아 돌면서 하회마을이라는 거대한 물돌이동을 또 하나 빚고, 마지막으로 예천 용궁에 이르러 거의 360도를 휘감아 돌아나가면서 마지막 물돌이동을 빚으니 마치 거대한 청룡이 유유히 유영(游泳)하는 듯한 모습의 회룡포(回龍浦)마을이다.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빚은 이들 3대 물돌이동 중에서 무섬은 아직도 한갓진 시골 마을로 남아있다. 6년 전 외나무다리를 복원하기 전까지 찾는 이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방송과 언론보도를 통하여 알려지면서 부터 외지인들이 찾기 시작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북 북부지역을 관통하면서 흐르는 내성천이 빚은 3대 물돌이마을인 무섬마을의 아침.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시계
반대방향으로 마을을 휘감고 나간다.


 금빛 모래밭 위의 외나무다리 저 너머엔 별천지 무섬마을이

경북 영주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 무섬을 찾는 어른·아이 모두에게 최고의 놀잇감이다.

경북 영주시 수도리(水島里) 무섬마을. 이름은 섬이지만 섬마을은 아니다. 안동 하회마을, 예천 회룡포와 더불어 경북 북부지방의 대표적인 3대 물돌이동(洞) 중의 하나인 이 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물섬’으로 불리다가 무섬이 됐다. 무섬마을은 태백산 줄기인 안동의 학가산(鶴駕山) 줄기 끝자락이 만든 수려한 자연구릉(自然丘陵)에 안겨 서남향으로 자리한 마을로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무섬 마을로 돌출된 반도형상의 동쪽 일부를 제외한 삼면을 감싸 휘돌아 흐르고, 내 안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모래톱 위에 마을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전형적인 물돌이 마을이다. 마을 앞을 돌아 나가는 내성천은 맑고 잔잔하며, 산과 물이 태극모양으로 서로 안고 휘감아돌아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을 이룸에 따라서 산수의 경치가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이 마을은 예부터 풍수지리학상으로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또는 돌출된 반도형상이 마치 매화꽃잎이 땅에 떨어진 모습을 닮았다 하여 매화낙지형국(梅花落地形局)으로 불리면서 길지(吉地) 중의 길지로 꼽혔다. 또 마을 동쪽 500m 지점에서 태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발원한 서천(西川)이 합류하여 마을 전체를 한 바퀴 휘감아 흐르면서 마을 건너편 아홉 골짜기의 물을 흡수하여 흐른다고 하여 구수도회(九水到廻)라고도 불렀다.
 
무섬마을은 마을 서쪽 앞을 지나는 내성천이 주된 경관을 이루기에 대부분의 주택이 풍수적 배치법을 쫓아서 강을 향하여 배치된
서남향의 집으로, 이는 강과 산의 흐름을 거스리지 않고 자연의 기운을 그대로 이어받기 위해서다. 또 무섬마을에는 우물이 없다. 풍수지리상 물위에 떠 있는 연꽃형상이기에 우물을 뚫으면 마을이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식수는
 빗물을 모아두거나 강에서 길어서 먹었다고 한다. 자연지리적인 길지를 최대한 활용하되,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자연의 기운을 거스르지 않으려 애썼던 무섬사람들, 이처럼 무섬마을은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마을을 조성했던 마을사람들의 노력으로 일궈낸 길지이다. 하지만, 이 마을을 풍수적으로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들이 말하는 산수태극에 연화부수형과 매화낙지, 구수도회형국은 다소 아전인수적(我田引水的)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감이 있어 보인다. 왜나하면 주위산세가 태극형도 연꽃잎이라기에는 좀 부족하며, 또 마을이 등을 기대고 있는 반도형상으로 떨어진 학가산 낙맥(落脈)도 매화꽃잎인 매판(梅瓣)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고, 아홉 물길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고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연유로 이 마을에서 큰 인물이 나지 못했고, 단지 내성천과 서천이 가져다 주는 풍부한 물길 덕으로 그냥 근근히 자급자족하면서 척박한 경상북부 산간지방의 여타 다른 마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다소 여유롭게 살았던 것이다. 여기에 보다 중요한 사실은 입향조(入鄕祖)인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수의 만죽재(晩竹齋)나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인 선성김씨(宣城金氏) 김락풍(金樂馮, 1825 - 1900)의 해우당(海愚堂)조차도 올바른 좌향(坐向)과 정맥(正脈)을 다소 벗어 났으니 이는 당연한 현상으로 보인다.
 
무섬마을에는 서쪽으로 돌출된 반도형상의 지형적 특징으로 인하여 경작지가 거의없다. 단지 마을의 하류에만 조그마한 경작지가 있을 뿐이다. 마을 앞 내성천변에는 8,000평 이상의 자연모래사장이 분포되어 있어 금빛 모래사장을 자랑한다. 그래서 낭만적인 이름만큼 마을도 아름답다. 낙동강 샛강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가고, 사행천을 따라 금빛 모래톱이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모래톱 한편에는 어른 무릎까지 찰까 말까 한 얕은 물이 은하수처럼 흘러간다. 물이 모랫바닥으로 스며들어가지 않는 것은 모래 퇴적층이 8~22m에 달하기 때문이다
 
무섬이란 이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 이름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물섬으로 불리우다가 어느새 무섬이 됐다. 이는 소백산에서 발원한 서천과 태백산에서 발원한 내성천이 마을 뒷편에서 만나 350도 정도로 마을을 휘돌아 나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중국 섬계(剡溪)지역의 지형과 비슷하다고 하여 '섬계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천군 진혈면(辰穴面)에 속해 있다가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영주군 평온면에 편입되었고, 1988년 2월에 영주군 문수면에 편입되었다.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무섬을 제대로 느낄려면 맞은편 언덕에 올라 내려다보면 된다. 물이 크게 휘감는 마을은 오목렌즈를 들이댄 것처럼 도드라져 보이면서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이고, 뱀처럼 휜 물길 안품인 섬 속으로 한옥 초가 50여 채가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자연이 만들어낸 보름달 안에 연꽃 하나가 들어앉은 형국이다.

 무섬의 명물은 마을 이편과 저편을 잇는 외나무다리다. 금빛 모래톱과 은빛 여울에 말뚝 188개를 박고 그 위에 널판 124개를 얹은 이 외나무 다리는 1973년 콘크리트 다리가 생긴 뒤 철거되었다가 2005년 복원했다. 다리는 구불구불 곡선이다. 상판도 반듯하지 않아 뒤뚱뒤뚱 위태롭게 건너가야 한다. 그래서 더 멋스럽다. 외나무다리 한쪽 끝에 서 있으면 맞은편에서 소설 『소나기』의 소녀가 나타날 것만 같다. 예전 이 자리에 있었던 다리 이름도 몽동(夢童)골다리다. 꿈속 아이들이 건너는 다리라는 뜻이리라.

 무섬의 다리는 어제와 오늘을 잇는 다리이기도 하다. 일부 마을 주민들에게 이 외나무다리는 한국전쟁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다. 대구에서 학교에 다니던 그는 할머니 댁으로 피란을 오면서 이 다리를 처음 만났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 전쟁에 나갔던 그의 형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곳 노인들의 기억에 의하면, “몽동골다리는 일꾼들이 물 건너 논밭으로 일하러 가는 다리야.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지. 지금 마을 앞에 있는 콘크리트다리 자리에도 다리가 있었는데, 도랑나들다리라고 했어. 아침이면 아이들이 학교 가는 다리였지. 마을 뒤편에도 다리가 하나 더 있었네. 뒷나들다리라고. 영주 장날이나 나들이 갈 때 건너는 다리였지.”

 외나무다리 재건은 온전히 마을 어르신의 작품이었다. 황혼의 나이에 고향을 다시 찾은 이들이 주도해 비용을 마련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향우에게 격문을 돌려 십시일반 돈을 마련했다. 복원을 주도한 김한세씨는 “예전 외나무다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빠짐없이 동참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이 외나무 다리는 여름 홍수 때는 떠내려가고, 가을이 오면 다시 놓곤 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이도 잠시뿐, 이제 겨우 자리를 잡은 이 외나무다리가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3년이 지나면 내성천 상류에 영주댐이 들어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무섬 사람들은 “댐이 생기면 강물이 줄고 모래톱에 풀이 무성해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은하수 같은 물길이 야위어 도랑이 되고 나면 다리도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추억 그윽한 옛 풍경이 안타깝게도 또 하나 사라질 판이다.

 내성천은 무섬마을 동쪽에서 흘러들어와 시계 반대방향으로 진행하다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마을을 휘감은 물길의 각도가 350도에 가깝다. 강바닥은 모두 모래밭이다. 사실 100m 남짓한 강폭에서 물이 흐르는 곳은 일부분이며 대부분 모래 평원을 이루고 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모래밭을 보면 자연스럽게 맨발로 걷고 싶은 충동이 인다. 발바닥으로 모래를 비비며 걷는 느낌이 좋다. 소금을 밟는 것처럼 서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 정도 걸린다. 무섬마을 모래밭 라운드다.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인 만죽재의 사랑채. 1666년 처음 터를 잡았으며, 지금의 집은 120여 년 전에 중수한 것이다.
 

2. 반남박씨(潘南朴氏)와 선성김씨(宣城金氏)가 집성촌(集姓村)을 이루면서 사는 마을

 

무섬마을에 사람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것은 반남박씨(潘南朴氏)의 입향조(入鄕祖)인 박수(1642 ~ 1729)가 이 마을에 들어와 만죽재(晩竹齋)를 건립하고 터전을 개척하면서 부터다. 무섬의 서편 건너 마을인 머렴(遠岩)에 거주하던 박경안(朴景顔)과 선성김씨의 둘째 아들 박수가 결혼 후 분가하기 위하여 현종 7년(1666년) 강 건너 산천이 맑고 고우며 산림(山林)이 그윽한 곳을 개척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무섬마을이다. 당시 그가 지은 한옥을 몇 차례 중수한 것이 현재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인 만죽재다. 지금 모습은 120여 년 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와의 일부는 300년 전 당시의 것이다. 이후 그의 증손녀와 결혼한 증손서(曾孫壻: 증손녀의 남편)인 선성김씨(宣城金氏; 예안김씨라고도 함) 김대(金臺, 1732 ~ 1809)가 영조 33년(1757년)에 처가 마을인 이곳으로 들어와서 선성김씨의 입향조가 되었다. 이때부터 무섬마을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함께 두 집안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점차 인구가 늘어나면서 구한말(舊韓末)에는 120여 가구에 주민 500여 명이 살았을 만큼 번성했지만,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고, 주민들의 이농이 늘면서 마을규모가 점차 줄어 한때는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가 시행한 '영남북부 유교문화권 사업정책'으로 전통마을로 지정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 마을에는 만죽재와 해우당을 비롯하여 총 9점의 지정문화재가 있고 100여 년이 넘는 고택(古宅0도 16동이나 남아 있어 옛사람들의 자취와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3. 'ㅁ'字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와 까치구멍집

태백산을 중심으로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같은 경상북부 지방은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인하여 겨울철에는 매서운 바람과 더불어 추위가 아주 심한 곳이다. 그래서 이같은 매서운 바람과 추위를 막아줄 가옥이 필요했다. 그결과 나타난 것이 바로 외풍과 추위를 막아주는 집구조인 'ㅁ'자 가옥이다. 무섬마을 가옥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 마을의 전통 기와가옥은 모두 'ㅁ'자형으로 경북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를 띤다. 때문에 집안에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등이 사방을 둘러싸듯 배치되어 있어 대문 밖에서는 집안의 생활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무섬마을 전통가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드나드는 문이 따로 있고, 안채를 사랑채보다 높게지어 햇볕이 잘들고 통풍이 잘되게 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유교적 격식을 엄격하게 거주환경에도 적용한 결과이다.

 

또다른 특징으로는 집주인의 신분에 따라 사랑채 기둥의 모양을 달리하고 있으며 학가산의 낙맥을 쫓아 서남향으로 지었다는 점이다. 안채와 달리 사랑채는 밖에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무섬마을 전통가옥들은 그 집 주인의 신분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사랑채의 기둥을 차별화했는데, 같은 양반이라도 벼슬한 사람이 거처하는 집의 사랑채에는 원기둥을, 벼슬을 못한 사람은 각진 기둥을 세웠다. 또 집주인의 신분에 따라 사랑채의 모양을 달리한 무섬마을의 고가는 대부분 자연지형을 쫓아서 서남향이다. 이는 북동쪽에서 흐르는 산맥의 정기를 고스란히 이어받기 위해 가옥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이 마을 초가고가중 특이한 것은 태백산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과 경상도 북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산간벽촌의 서민주택으로 지붕마루 양단의 하부에 까치가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까치구멍집이다. 외부의 찬 공기 유입을 막으면서 내부공기의 외부순환을 이루도록 설계된 특이한 이 구멍으로 까치가 드나들기에 까치구멍집으로 불리워진 이 초가는 겨울철 유독 추위가 심한 경북 북부지방만의 독특한 가옥형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무섬마을 입향조인 반남박씨 수가 현종 7년(1666년)에 이곳에 최초로 들어와 지은 집이기에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인 만죽재는 경북 북부 산간지역 특유의 ‘ㅁ’자형 배치를 따르고 있고 기와에는 '1666년 8월 19일 김종일 만들다'라는 글이 남아 있다. ‘ㅁ’ 지붕 아래 네모난 봉당이 작은 정원처럼 아늑하다. 만죽재에는 박씨 문중 직계손 종부 김시해씨가 혼자 살고 있다. 김씨는 사랑채와 별간 정자를 민박으로 내놨다. 민박 운영이 큰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찾아오는 손님이랑 이야기하는 게 재미있어 시작했다. 기력이 없어 식사까지 내놓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반응은 좋단다. 그는 “내가 군불을 못 때서 손님들이 직접 해야 하는 데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마을 앞 강물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자인 청퇴정(淸退亭)은 이 마을 최고의 명당이자 경관지다.

  무섬마을은 반남 박씨와 함께 선성 김씨가 동거하는 집성촌이기에 그 외 타성을 가진 주민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또다른 입향조인 선성 김씨 종택 해우당(海愚堂)은 김대의 셋째집 손자 영각(永珏, 1809 ~ 1876)이 1856년에 건립하였고, 고종 떄 흥선대원군과 친분을 맺어 이하응이 집권 후 알천으로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락풍(金樂馮, 1825 ~ 1900)이 1879년에 중수하였다.

이 집은 경상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ㅁ'자 가옥의 평면구성을 잘 갖추고 있고 수도리에서 규모가 가장 큰 집이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 '해우당(海愚堂)' 편액은 파락호로 살 때 흥선대원군이 이집에 묵고 가면서 남긴 친필로 현재 직계손이 살고 있다. 여기서도 민박이 가능하다. 만죽재와 해우당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문화재다.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에서 묵는 하룻밤은 어느 숙소보다 특별하다. 장작이 수북이 쌓인 아궁이와 누렇게 바랜 아랫목 장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조용한 고택에 들어앉아 한껏 유유자적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무섬마을엔 가옥 50여 채가 있다. 흥미로운 건, 가옥 대부분이 강물을 보고 마주 앉아있다는 사실이다. 길은 강을 보고 일렬로 나 있기에 강둑에서 어느 한 집을 보고 찾아가려면 직선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더 재미있는 동네 탐방이 된다. 가옥마다 한옥이든 초가든 저마다 집의 특성과 구조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한옥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더 재미 있는 사실은 시인 조지훈의 처가도 이 마을 안에 있는데, 처음 장가왔다가 떠나면서 수도리에 두고온 부인을 생각하며 쓴 시가 바로 '별리(別離)'라는 시다. 그의 처가에는 현재 90세인 그의 처가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놓고 고즈넉하게 살고 있다.

 

 

   별리(別離)

 

 

                                 조지훈

 

 

 

 푸른기와 이끼 낀 지붕너머로

 나즉히 흰 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註1)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註2) 자락에

 말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가고

 방울소리만 아련히

 끊질듯 끊질듯 고운 뫼아리 .....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꺽어서 채찍삼고 가옵신 님아 .....

 

*註1: 두리기둥 - 둥근기둥

 註2: 당홍치마 - 약간 자주빛을 띤 붉은 물감을 들인 치마

 

 

   

무섬마을에서 하회마을은 가깝다. 시간이 난다면 유명한 국내외의 건축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칭송하는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들러볼 일이다. 지금같은 한여름에는 정말로 진가를 발휘한다. 건축물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뿐만아니라, 기회가 된다면 이제는 추억이 된 기차역인 문수역도 찾아가 볼 일이다. 1923년에 생긴 중앙선 기차역인 문수역은 이제는 화물차만 정거하는 역으로 바뀐 추억의 기차역이긴 하지만, 1920년 대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무척 새롭게 다가오는 곳이기도 하다.


4,여행 정보

 
무섬마을 안쪽에 무섬마을 전시관과 함께 한옥문화체험관이 있다. 영주시가 지난 4월 개관한 것이다. 운영을 맡고 있는 박경진(51)씨는 지난해까지 경북 청송군에 있는 99칸짜리 한옥 송소고택을 지켰던 ‘한옥스테이’ 전문가다. 7년 동안 송소고택을 운영하며 익힌 노하우를 이곳에서 다시 연출할 예정이다. 그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무섬마을에서 한옥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시관과 체험관은 환하게 빛나는 소나무 빛이 채 가시지 않은 새 건물이다. 무섬의 역사가 담긴 전시관은 의외로 볼 것이 많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했던 마을 역사도 알 수 있다. 민박으로 쓰이는 한옥체험관은 모두 네 동이 있다. 가족단위부터 50인 이상 단체 등 다양한 형태의 숙박이 가능하다. 한옥의 매력은 밤이 돼야 알 수 있다. 한여름 문만 열어놓아도 선선한 기운이 가득하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체험관 뒤편 참나무 잎 부딪는 소리가 방안까지 흘러 들어온다. 여름방학 동안에는 염색체험 등 가족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한다. 054-634-0040.
 

시골마을, 특히 무섬마을처럼 예스러움이 한껏 살아 있는 마을의 밤은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그간 익숙했던 인공의 빛을 찾아 헤매다가도 조금만 지나면 곱디고운 달빛의 정취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흐르는 물에 비친 달과 외나무다리의 조화는 말로 형언하기 힘든 단아한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무섬마을은 사진 동호회가 즐겨 찾는 명소 중의 하나다. 외나무다리도 포인트이지만, 물이 크게 휘돌아나가는 마을 풍경이 대표 포인트다. 다리 건너 몽동골 논밭을 따라 언덕에 올라가면 무섬마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촬영 포인트가 나타난다. 해 뜰 무렵과 석양 비칠 때가 사진 찍기 좋은 시간이다.

 

  

5. 찾아 가는 길 

 

무섬마을에 들어가려면 영동고속도로 만종IC에서 중앙고속도로 영주 IC를 빠져나와 28번 국도를 타고 문수면 방향으로 가다 보면 나온다. 서울에서 영주까지 3시간이면 충분하고, 영주에서 마을까지는 10분이면 충분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할려면, 서울 청량리역에서 영주행 열차가 하루 8차례 운행된다. 3시간 30분 소요. 동서울 터미널에서 영주까지 30분~1시간 단위로 고속버스가 다닌다. 영주에서 무섬까지는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무섬마을에는 최근에 문을 연 경북 향토음식을 내는 퓨전 한정식집 ‘무섬골동반’이 있지만, 영주 시내에 나가면 보다 좋은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특히 영주는 예천한우와 안동한우로 유명한 곳이기에 값싸고 질좋은 한우고기를 부담없이 마음껏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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