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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새로 찾은 충주호와 四大士林

지난 금요일 정선 화암동굴 갔다가 태백 오투에서 자고 그 다음 날 충주호 유람하고 왔는데,
간만에 간 단양팔경과 충주호는 새롭다.

그 사이 옥순봉과 구담봉을 제외한 이곳 저곳 바위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추가되었고, 또 장회나루 호반가에는 진짠지
가짠지 모르겠지만 퇴계의 愛妓였다는 丹陽官妓인 梅香이의 무덤까지 조성해 놓았는데,

설명으로는 퇴계가 단양군수시절 단양원 소속의 관기였다고 한다.
그 관기가 죽자 무덤을 평소 퇴계와 뱃놀이를 즐겼던 충주호반가에 조성했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글쎄다. 일개 관기의 무덤을 호반가에 조성했다는 것 자체도 어불성설인데, 그것도 영남학파의 거두라는
퇴계의 愛妓라고 하니 더더욱 신뢰가 안간다.

뭐, 理氣互發로 理氣二元論을 주창한 엉터리 같은 주장과 학설이기에 비록 내가 좋아하지않는 사람일지언정 그래도 명색이
'東方의 朱子'라고까지 칭송되었던 東方 性理學의 巨頭가 아닌가. 그런 사람이 비록 한때 일시적일지언정 척박한 고을의 民草를 보살피고 살리는 사또질은 내팽개치고설랑 官妓를 옆에 끼고 거대한 충주호반에서 뱃놀이를 했다는 사실이 그렇고, 또 설령
그랬다손 치더라도 그 관기를 위해서 죽은 후 자기들이 물놀이 하던 호반가에 묻었다는 것도 별로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嶺南士林의 中樞이자 中心地에서 태어났기에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꼬맹이 때부터, 즉 아주 어려서 부터 書堂교육을 받았던
내 어릴적 기억의 편린에 남아 있는 꼬장 꼬장한 고집과 근엄한 가식으로 무장되어 있는 영남학파의 머릿 속에는 官妓는 말할
가치도 없고 비록 어였한 여염집과 양반집 여인네들 조차도 인간이라는 생각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인간도 아닌 賤出 중의
천출인 일개 관기를 위해서, 그것도 근엄한 嶺南士林의 우두머리라는 퇴계가 죽은 관기를 위해서 자기들이 놀았던 호반가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語不成說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이는 사실확인할 가치조차없는 그저 관광객을 위해서

근래에 지어낸 말이 아닌가 한다.

호반가의 구담봉을 마주하고 조성되어 있는 돌막으로 만든 매향이의 무덤이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속으로 "참 잘도 갖다
붙이는구나. 퇴계의 애기라 그러지말고 그냥 풍류를 좋아했던 어떤 院의 애기라 그랬으면 차라리 설득력이나 있을 것을.."
하면서 혀을 끌끌 찼던 기억이 있다.

이조 480년을 관통하면서 영남의 두 거대사림 중 주로 관계에 진출했었던 것이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으로 대표되는 퇴계의
영남학파고(그래서 이들이 이조 480년간 조정을 농단했다), 초야에 남아 독야청천했던 것이 지리산 자락 矢川 絲里에 있는
德川書院으로 대표되는 南冥의 영남학파이며, 여기에 을사사화 이후 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반론하여, 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장성 황룡 필암리 院과 남원의 院  및

詠의 院을 중심 으로 한 河西 金麟厚(1510 ~ 1560)를 필두로 한 湖西學派와 이황의 理氣二元論에 반대하여 理氣一元論을 주창하면서

십만양병을 하여 닥아올 倭亂에 대비하자고 했었던 율곡 이이를 필두로 한 기호학파가 있었지만, 이들 4大諸學派 중 관기 포함 기생과의

염분과 정분을 문학으로 까지 끌고간 선비들은 부안의 선비 劉希慶과 홍길동전의 저자인 許筠이 사랑했었던 유희경의 愛妓 李梅窓을 비롯하여

모두들 호서학파출신들이지 꼬장꼬장한 영남학파출신들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묘는 퇴계가 쓴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 되고도 남는다고 할 것이다.

 

지인의 글 옮겨 놓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