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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영화를 버린 고행, 구화산에서 지장왕보살로 화현하다.

1. 중국 불교의 4대 성지 구화산(九華山, 1342m)

산서성(山西省)에 있는 오대산(五臺山),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아미산(峨眉山),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보타산(普陀山)과 더불어 중국 4대(四大) 불교명산(佛敎名山)인 '구화산'은 안휘성(安徽省) 츠저우시(池州市) 동남단에 자리 잡고 있는 명산으로 북으로는 장강(長江, 양자강)과 접해있고, 남쪽으로는 황산(黃山)을 바라보고, 동쪽으로는 거대한 호수인 태평호(太平湖)에 임(臨)한 전국문명풍경여유구(全國文明風景旅游區)로 중국에서 으뜸가는 자연과 문화의 쌍유산지(雙遺産地)로 세계적으로 이름난 불교도량(佛敎道場)이기에 동진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불교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곳이다. 구화산은 중국 불교 4대 성지 중 하나로 지장보살기복도량이기에 '연화불국(蓮花佛國)'이라는 아름다운 영예를 안고 있다. 그래서 이곳은 '인불공존(人佛共存)'의 심령정토(心靈淨土)이기에 수신양성(修身養性)의 '인간천당(人間天堂)'이며 인간들이 미래의 복(福)을 구하는 기복성지(祈福聖地)다.
이 산은 총 120㎢ 면적에 174㎢의 보호면적을 갖춘 거대한 산괴(山塊)로 천대(天台), 시왕(十王), 연화(蓮花), 천주(天柱) 등 거대하고 웅장한 9개의 봉우리를 비롯한 총 99개 봉우리와 깊은 계곡, 괴석과 오래된 동굴(怪石古洞), 푸른 소나무와 비취빛 대나무(蒼松翠竹)가 우거져 뭇 산봉이 아름다움을 다투고 괴석이 솟아 있는 아홉개의 주봉이 마치 아홉 송이의 연꽃 마냥 갖은 자태로 신운(神韻)을 자랑하며, 가장 높은 주봉인 시왕봉(十王峰)은 높이가 해발 1,342m로 마치 지옥의 시왕인양 우뚝 솟아 아름다운 절경을 선보이고 있기에 불교문화와 관련이 많고, 또 자연적 경치가 유다르므로 '연화불국(蓮花佛國, 4대 총림 중 하나로 가장 큰 법당을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사찰임)'이라는 칭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같은 구화산의 면면한 산봉우리들은 마치 부처가 잠자는 듯한 천연수불(天然睡佛)의 모습을 형성하여 자연경관과 불교문화의 유기적인 융합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
원래는 주변에 9개의 높은 봉우리가 있어 구자산(九子山, 영양산)으로 불렸으나, 당나라 때의 대시인 이태백(李太白)이 이 산을 세차례 유람하면서 산이 연꽃같다고 해 '영산개구화(靈山開九華)'라는 천고의 시구(妙有兩分氣 靈山開九華)를 지어내 이로부터 구화산으로 바뀌어 불리워지고 있다. 구화산은 중국의 제산(諸山) 중 유일하게 산 위에 분지를 이루고 있어 약 6천여 가구의 민가가 있는 바, 이 민가들과 수 많은 절들이 어울려서 공존하고 있는데, 중국 정부에서는 추후 이들 민가들을 산밑으로 이주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산위 절에 약 1,000명 정도의 스님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명.청(明淸) 대의 전성기에는 150여 개의 사찰과 4,000여 명의 스님들이 거주했었다고 한다.
구화산은 천대, 부용, 선도, 십왕, 사자, 선녀, 미녀봉 등 99개의 산봉우리로 이어져 있으며, 계곡, 폭포, 기암괴석, 오랜 동굴,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아 산의 절경이 독특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명승고적들이 도처에 분포되어 있어 예로부터 동남 제일 산으로 불리고 있는 데, 특히 숫자'9'와 인연이 많다.
'9'개의 높은 봉우리를 비롯한 '99'개의 봉우리를 가졌고, 이곳에서 수행하여 지장왕보살로 추앙받는 김교각스님이 '99'세에 열반에 들었을뿐만 아니라 이곳을 오르는 길도 '아흔아홉(99)'구비의 길이고, 이곳에서 등신불이 되어 남아 있는 등신불도 '9'구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구화산에는 '천대(天台)에 오르지 않으면 헛 온 것으로 다음에 또 와야 한다'는 민간 속담이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천대의 경치는 절승을 이루고 있다. 절승의 풍광을 자랑하는 천대관광구는 구화산 경치구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고산경치지구로 총면적은 8 ㎢에 달하며 경치구내에 사찰이 우뚝 솟아 있고 첩첩이 늘어선 산봉우리들이 서로 어우러져 돋보이며 기묘한 바위가 빼곡히 솟아 있어 신비로운 절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혜거사로부터 천대정상과 십왕봉을 포함하는 천대경구는 절벽에 걸린 듯한 기봉괴석(奇峰怪石)과 고암현사(高巖懸寺)들이 돋보이는 절승(絶勝)으로 조교사(弔橋寺), 소사자봉(小獅子峰),관도봉(關刀峰),면벽석(面壁石),관음봉(觀音峰), 금닭이 하늘문을 여는 바위(金鷄叫天門),선인타고(仙人打鼓),김교각이 경을 읽으면서 예배를 보았던 발자국이 바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고배경대(古拜經台),금귀조북두(金龜朝北斗),초불봉,천대(天台),연선대(宴仙臺),시왕봉과 발우봉(十王峰과 鉢盂峰) 등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바위들이 많다. 절경을 자랑하는 천대경구(天台景區)로 갈려면 버스로 민원경구(閔園景區)에 도착한 후 마치 거대한 봉황(鳳凰)이 날개(회)를 치면서 시왕봉으로 날아 오르는 듯한 기묘한 모습을 한 수령 1300년의 천하제일송(天下第一松)인 봉황송(鳳凰松, 바로 앞에 비구니암자들이 운집되어 있다) 등산길을 따라 천대로 이동하면서 혜거사,조교,소사자봉,관음봉,초불봉,고배경대, 천대 등을 구경하던지 아니면 민원경구에서 케이블카로 고배경대로 이동하면서 관음봉,대붕청경석(大鵬청經石),천대봉(天台峰),시왕봉(十王峰)을 둘러보면서 오를 수도 있다. 특히 천대 정상에 있는 천대사(天台寺)에 투숙하면 일출과 운해를 볼 수 있는 바, 이를 포함하여 구화산에 오르는 등산로는 총 86,800개의 돌계단으로 이뤄져 있다.
구화산은 미륵불이 오기 전까지 중생을 제도하도록 석가모니의 위촉을 받은 지장보살("중생제도 후 보리를 이룰지니 지옥을 파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으리"란 서원을 세운 보살)이 화현한 도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던 곳으로 신라왕자 김교각이 지장왕보살로 추앙받는 곳이기에 특히 우리나라 불교에서의 구화산은 매우 의미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화산의 불교활동은 동진 융안 5년, 서기 401년 승려 배도선사가 이곳에 사원 복호암을 건조하고 전도를 하면서 시작됐다. 그 이후 신라 33대 성덕왕의 첫 번째 왕자인 김교각 스님으로 인해 구화산이 불교의 성지로 변모했다.
왕족의 편안한 삶을 뒤로 하고 24세에 출가해 스님이 된 김교각 스님은 중국에 건너가 각지를 돌며 구도생활을 하다 구화산 동애암에 굴을 파고 이곳에서 고행수도를 시작했다. 그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이에 감동을 받았고, 당시의 명사 제갈절 등이 돈과 힘을 시주해 782년에 구화산의 첫 사찰인 화성사(化城寺: 구화산의 開山寺院으로 김교각이 열반하기까지 39년간 주지로 있던 절)를 짓게 됐으며, 본격적인 불법을 설파했다. 이 때 제갈절에 이어 구화산 99산봉우리를 가지고 있는 산주인인 민공(閔公)이란 이가 김교각을 도와준다. 그가 김교각에게 "얼마만큼의 땅을 시주하면 되겠느냐?"고 묻자 김교각이 답하기를 " 가사로 덮을 만한 땅이면 된다."고 했다. 이에 민공이 흔쾌이 "그러라"고 하자 김교각스님이 입었던 가사를 공중에 던졌다고 한다. 김교각이 가사를 공중에 던지자 어디에서 네마리 봉황이 날아와서 가사를 물고 날아가서 구화산 99봉을 모두 덮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교각이 이 땅에 절을 세웠고 그것이 지금의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민공의 땅이였다는 민원경구(閔園景區)에 가면 마치 날개를 치면서 날아갈듯한 모습을 한 1300년 수령의 봉황송이 있고, 그 바로 앞에 문수동굴과 시왕봉이 있어 이들의 전설을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이후 김교각스님의 명성이 높아져 중국 각지는 물론 신라에서까지 불법을 들으러 신도들이 구화산으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구화산은 불교의 성지로 발돋움했다.
김교각 스님은 구화산에서 75년간 수행하다 서기 794년 음력 7월 30일 향년 99세로 열반했다. 특히 김교각 스님은 자신의 시신을 독 속에 넣어 3년간을 기다려 보고, 그래도 썩지 않거든,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안휘성은 비가 많아 고온다습하여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3년 뒤 김교각 스님의 모습은 열반할 때 모습 그대로 살아있는 듯 남아있어 사람들은 지장보살이 환생한 것으로 믿고 스님의 등신불을 지장보전에 모시게 됐다. 그는 또한 살아생전에 그의 높은 도행으로 김지장왕보살이란 칭호를 얻기도 했다.
명.청시절 불교가 제일 번성할 때에는 150여 개의 절에 약 4천여 명의 스님들이 거주했다고 하지만, 현재는 84채의 사원과 6,000불의 불상, 그리고 1,300여 건의 유물과 그 외 황제의 교지, 장경, 기타 진기한 불교문물이 2,000여 점이 있으며, 1,000여 명의 스님이 거주하고 있다.
특히 구화산 육신보전에는 김교각 스님의 실제 등신불이 원형 그대로 모셔져 있어 중국 불교인들은 물론 한국에서도 많은 불교인들이 찾고 있다. 특히 불교 신도들에게는 일생에 꼭 한 번 다녀가고 싶은 불교의 성지로 손꼽히고 있기도 하다. 1362년 된 등신불 보탑이 있는 육신보전은 팔각칠층 보탑인데 지장보살의 응화신(應化身: 대원보살)을 모셨다고 해서 편액에는 고기육(肉)자 대신에 사지지(肢)자의 고기육(月)자변을 따와서 육신보탑(月身寶塔)으로 달아 놓았다.
구화산을 찾는 관광객들은 백세궁, 화성사, 육신보전, 천태사, 기원사, 고배경대 상선당 등을 꼭 참배하는데, 이중 화성사는 구화산의 개산 사원으로서 소박하면서도 고박하지만 그렇게 크지는 않으며 현재는 구화산 역사문물관이 되어 있다. 사원에는 명나라의 역대 황제가 하사한 금인과 명나라 판본의 장경 6,000여 권 및 청나라 범문 패엽경 등 진귀한 문물들과 김교각스님 일대기 및 등신불사진 등이 소장돼 있다.
김교각의 등신불이 안치되어 있는 육신보전은·김교각 스님이 이곳에서 입적한 후 얼굴이 산 사람 같아 명나라 선종 황제가 ‘호국육신보탑(護國肉身寶塔)’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얻어진 명칭이다. 이곳 육신보전의 주지스님도 김교각 스님은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이 지역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생불이라고 말할 정도로 김교각 스님은 이 지역에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다. 천대 정상에 있는 천대사는 김교각 스님이 거주하던 고찰로써 산세를 따라 5층 누각으로 지어졌으며, 법당 내의 대들보와 벽체 사이에는 작은 목불들이 걸려 있다.
육신보전 아래에 있는 상선당에는 진기한 금사천, 금전수가 있는데 이백의 고주전이 변해 생겼다고 한다. 고배경대는 김교각 스님이 수행하면서 이곳에 서서 침식을 잊고 불경을 읽었다는 곳이다. 얼마나 열중해서 경을 읽었는지 그 곳의 돌에 스님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데, 당국에서는 이 발자국을 ‘김지장 각인’이란 이름으로 2005년 4월 8일 문화재로 공포되어 보호하고 있다.
구화산에는 김교각의 뒤를 이은 구화산의 중흥조인 무하화상(無瑕和常)의 육신을 모신 백세궁(百歲宮)이 있다. 구화옛거리에서 출발하여 백세궁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서(약 5분 소요) 도보로 액 8분쯤 가면 구화산에서 황금색을 칠하지 않고 흰색으로 칠한 유일한 건물로 무하스님의 육신을 모시기 위해서 지은 사찰인 백세궁이 나타난다. 이곳에 등신불로 안치되어 있는 무하화상은 사천성 오대산에서 14세 때 출가하여 전국을 만행하다가 김지장보살을 경배하기 위하여 삼보 1배(三步一拜)로 2년간 걸려서 구화산으로 왔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이곳에서 100년 간 수행하다가 126세에 열반에 들었다. 그의 등신불은 약 35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육신불로 특이하게도 수인(手印)이 위로 올라가 있다. 이는 백세궁에 큰 화재가 났을 때 제자들이 화재를 피하고자 들어 옮기려고 했으나 움직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제자들이 "그럼, 우리도 가지 않겠다"고 했드니 갑자기 수인이 위로 올라가면서 큰비가 내렸다고 하며, 현재 이 등신불만 남아있다.
구화산 입구에 1999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4여 년간 조성 중에 있는 대원문화원(大願文化園)에는 90m 높이의 김교각 스님의 거대한 동상이 우뚝 서 있다. 구화산문의 인덕스님이 살아계실 때인 1995년에 계획하고, 1998년 정부 허가를 받아 1999년 9월 9일 공사를 시작하여 계획부터 완공까지 약 17년간이 소요되었으며 이제 점안식만 남겨두고 있다. 구화산 북측의 제일 큰 분지인 가촌(柯村) 남부에 위치한 천하명당인 이곳은 총 462.39헥타르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서 총 20억인민폐(한화 약 4000억원)가 투자된 대규모 불교문화박물관이다. 이곳 정상에는 김교각이 당나라에 들어 온 나이(24세)에 맞추어 24m의 연화좌대 위에 75년간 구화산에서 수행한 년수를 쫓아서 75m 높이의 거대한 지장입상을 세웠는데 이 양자의 높이를 더하면 김교각이 입적한 나이(99세)인 99m높이(김교각의 일생을 대표)가 된다. 오른손에 석장을 짚고 왼손에 여의주를 든 모습의 이 지장입상에는 총 1,100톤의 청동이 들어 갔으며 신도들의 순금 목걸이, 반지, 귀걸이 등을 모은 80kg의 순금으로 180근을 들여서 얼굴을 제작했고 나머지는 전신을 금칠하는 개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세계 제일의 지장입상인 이 김지장왕보살상은 2012년 9월 30일 제1차 야관개관되었고, 2012년 11월 12일 제2차로 야관개관되어 우리가 보는 영광을 누렸다. 한국단체가 대원문화원에 들어 가기는 우리가 처음이라고 하며, 이 지장왕보살상의 점안식은 내년에 거행될 것이라고 한다. 추후 입장료는 2만인민폐로 책정되어 있다고 한다. 김지장왕보살상이 있는 이곳은 북경의 자금성을 능가하는 천하명당으로 향후 이 땅의 기운을 받아서 이곳에서 수 많은 고승들이 배출될 것으로 보여진다. 공고롭게도 이 김지장왕보살입상 앞에는 인공개울이 흐르고 개울 양안에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및 석가탑가 다보탑의 복제품을 그대로 조성하여 마치 불국사의 수십배 확장을 보는듯 하다. 그래서 이곳은 구화산과 함께 관광지로 각광받게 될 것으로 보여지며, 불교 본연의 수행신앙보다는 기복신앙위주인 중국과 한국의 불교신자들에게 더없이 좋은 장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일설에는 대원문화원은 중국과 한국 불교계가 합작으로 건설 중이란 소문이 있기도 하며 김교각 스님의 동상 점안식이 내년에 거행될 것으로 알려지고도 있지만 알 수없는 일이다.
중국 국가중점풍경명승구 국가 5A급 관광지로 지정되어있는 이곳 구화산 산사와 마을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관광지로 변모해 산사는 이들이 피운 향의 연기로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라서 산사 본연의 청정하면서도 신성한 맛이 없고 수 많은 신상들의 조각상들 때문에 불교 본연의 정신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반면에 이고에 기대어서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관광업에 종사하면서 생활하고 있기에 또 다른 보시가 이루어 지기도 한다. 구화산은 황산에서 버스로 약 3시간 소요되는 곳에 위치해 있어 황산과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관광코스이기도 하여 앞으로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 것으로 보인다.
구화산으로 오르는 산문은 해발 600m에, 마을은 해발 700m에, 주봉인 시왕봉은 해발 1343m고,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는 봉우리인 천대정정(天台正頂)은 해발 1306m에 위치하고 있기에 산문에서 부터 차례차례로
올라가면서 볼 수가 있게 되어있다.
중국의 불교 명산이라고 알려진 구화산은 사실 신라왕자 출신의 김교각 스님으로 인해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라 마치 한국의 불교 성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구화산(九華山)에 서린 신라의 魂 - 苦行의 길 택한 金喬覺

신라 성덕대왕(聖德大王)의 맏아들 김수충(金守忠)설이 있으나 유교적면 있어 김중경(金重慶)이 유력, 진신(眞身) 모신 고찰(古刹), 중국(中國) 민족 성지(聖地)로 우뚝서다.
중국 안휘성 합비시(合肥市) 남쪽에 구화산(九華山:해발 1342m)이 있다. 구화산은 아미산, 보타산, 오대산과 함께 중국의 4대 불교 성산(聖山)의 하나로 꼽히는데 무려 80여개의 사찰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구화산을 성산으로 만든 인물이 바로 김교각(金喬覺)이란 신라 왕자 출신 승려이다.
김교각(697 ~ 794)은 `쌀 보내준 은혜에 보답함(酬惠米)'이란 시에서 "비단 옷 납의로 갈아입고/불법을 닦으려 바다 건너 구화산에 이르렀네/나 본래 왕자의 몸으로/수행의 길에서 오용지를 만남이여라"고 자신이 신라의 왕자임을 스스로 밝혔다.
그는 서기 794년(신라 원성왕 10년) 99세의 나이로 입적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바, 역으로 계산하면 이는 그가 697년(효소왕 5년)에 태어났음을 뜻한다. 그는 24세 때인 719년(성덕왕 18년) 당나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가 무엇 때문에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중국으로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사주전(謝澍田) 교수는 그가 성덕왕의 장자 김수충(金守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삼국사기' 성덕왕 13년(714)조는 왕자 김수충을 당에 보내 숙위케 하자 당 현종이 그에게 제택(第宅)과 비단옷을 내렸다고 전하고 있고, 성덕왕 16년조는 견당대감(遣唐大監) 김수충이 돌아와 문선왕(공자) 10철 72제자의 그림을 바치자 이를 대학(大學)에 안치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문선왕 10철 72제자 등은 모두 유교와 관련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김교각이 과연 김수충인가는 의문이 있다.
신라서 겪은 정치경험
자유로운 참선 밑거름

이처럼 김교각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구화산에는 그에 관한 수많은 일화들이 전한다. 그는 719년 도당(渡唐)할
때 신라에서 볍씨(黃粒稻), 소나무씨(五銀松), 금지차씨(地藏茶), 삽살개 등 네가지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가 가지고 간 볍씨와 소나무씨는 구화산 분지에 뿌려져 현재 중국 볍씨의 원조가 되었고, 소나무씨는 구화산의 푸르고 청정한 기송(奇松)이 되었으며, 차씨는 금지차가 되었으니 차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온 것이 아니라 역으로 한국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가 데리고 간 삽살개는 평생 그의 수행을 도왔다고 하며, 그를 도운 삽살개는 현재 청동상으로 만들어져 그가 처음 절을 세웠다는 화성사 대웅전 바로 앞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으며 구화산을 지키는 영물로 여겨지고 있다.
다른 하나가 화성사 앞에 있는 기단만 남은 랑탑(娘娘塔)으로서, 현재는 기단만 남아 있는 이 탑은 신라 여인을 위해 세워졌다는 애틋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에서 사귀였던 낭낭이라는 처자가 그를 찾아왔는데 거친 바다를 건너고 또 낮설은 이국 땅을 밟으면서 물어 물어 찾아온 그녀를 보고도 연화좌에서 수행하는 스님이 너무 평온한지라 그 처자느 그만 우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래서 낭랑탑 기단 위에는 명안천(明眼泉)이 생겼는데, 후일 아들을 찾아 머나먼 신라에서 바다를 건너 구화산으로 찾아온 김교각의 어머니가 기쁜 나머지 너무 많이 울어 그만 실명했는데 김교각이 화성사 앞 우물에서 물을 길어 어머니의 눈을 씻기자 눈이 나았다 한다. 그래서 이 우물에 세운 보탑을 후세사람들이 명안천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성전(二聖殿)은 김교각의 외삼촌으로서 그를 데리러 왔다가 도리어 그에게 감화되어 승려가 된 소우(昭佑) 소보(昭保) 두 사람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인데 현재도 두 사람을 기리는 이성회가 매년 열린다.
이런 전설 외에 김교각이 고향으로 떠나는 자신의 동자에게 준 시는 그의 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문이 쓸쓸하여 집 생각 하더니/절방을 하직하고 구화산을 떠나는구나/난간에 기대어 죽마 타던 어린시절 그리워하던 너/금같은 불도의 땅도 너를 붙잡지 못하는구나/첨병곡의 달 구경도 마지막이며/자명구의 꽃놀이도 끝이 났구나/서운해 눈물 흘리지 말고 잘 가거라/노승은 안개와 노을을 벗하리라'
사찰생활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떠나는 어린 동자를 떠나보내며 김교각은 자연스레 고향 산천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교각은 `안개와 노을을 벗'하며 수행을 계속했다. 당시 불교계는 선종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으나 김교각이 경전을 읽고 참선을 계속하면서도 특정한 종파에 매달리지 않은 것은 신라에서 겪은 정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교각을 지장보살로 만든 것은 그가 입적한 후에 벌어진 신비로운 일 때문이다. 99세 때 김교각은 주위의 모든 승려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입적했는데 사찰에서는 그의 육신을 돌항아리에 넣었다. 3년 후에 열어보니 그때까지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해서 사람들은 그를 지장보살의 화신이라 여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장보살은 석가의 위촉을 받아 그가 죽은 후 미래불인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無佛)시대에 육도(六도)의 중생을 교화, 구제한다는 보살인데, '중생이 모두 제도한 후에 깨달음을 이룰 것이며, 지옥이 빌 때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으리라'는 지장보살의 서원(誓願)을 김교각은 육신으로 실현한 셈이었다.
김교각 스님을 지장보살의 화신이라고 확신한 당시 사람들이 그의 육신에 금을 입히고 3층 석탑을 세웠는데 후인들이 그 위에 세운 사찰이 바로 육신보전(肉身寶殿)이다. 김교각의 진신(眞身)을 모신 이 고찰은 797년 지었으며, 청나라 때 중건되었는데, 중국 민중불교의 절대적인 기복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백토와 쌀, 모닥불로 수행
99세 모든 것 버리고 입적

그가 신라 왕실을 버리고 중국으로 건너간 이유는 그 자신의 자각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신라왕실의 권력투쟁에 염증을 느낀 결과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는 현실의 유한한 가치보다 이상의 무한한 가치를 추구했다는 사실이다.
김교각은 식량과 의복이 부족할 때는 스스로 농사짓고 땔감을 해 날랐으며, 그래도 부족하자 백토와 쌀을 섞어 먹고, 모닥불만으로 한기를 이겼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어려운 수행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의 육신이 썩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전쟁의 시대, 증오의 시대, 갈등의 시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영원한 삶을 얻었던 김교각의 생애는 하찮은 것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는 우리들에게 다시금 인생의 의미를 생각게 해 준다.
3. 신라 성덕왕(聖德王)의 맏아들 김교각(金喬覺), 지장왕보살(地藏王菩薩)로 화현(化現)
하다.
김교각은 신라의 왕자로 법명은 교각(喬覺)이다. 719년 당 고종 영회4년(653년) 24세의 나이로 당으로 건너가 출가하여 교각(喬覺)이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이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만행(萬行)하다가 구화산으로 돌아와서 구화산(九華山) 화성사(化城寺)에서 자리를 잡고 구도 활동을 하면서 75년간 수련한 후 99세에 열반에 들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날에 열반에 들어 제자들에게 생사(生死)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때가 바로 당(唐) 정원 10년(신라 원성왕 10년)으로 지장의 나이가 99세가 되는 여름 음력 7월 30일이였다. 스님은 열반에 들기 전, 794년 제자들을 모아놓고 고별인사를 한 뒤 입적을 하였는데, 자신의 시신을 석함에 넣고 3년 후에도 썩지 않으면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하며 스님이 열반에 든 후 산이 울면서 허물어 졌고 돌이 굴러 내렸으며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났다고 한다. 김교각 스님은 열반 후에도 육신이 3년간 썩지 않아 신도와 승려들이 그를 지장보살(地藏菩萨)의 화신으로 인정하고 육신에 금을 입혀 등신불로 봉헌하였으며 이로 인해 구화산은 지장보살 도량이 되었다. 스님의 등신불은 현재 구화산 육신보전 내의 육신보탑(月身寶塔) 안에 모셔져 있으며 화성사는 구화산역사박물관을 겸하고 있고, 박물관에는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이 사방으로 둘러져 있다.

김교각 스님의 행적은 19년 후인 813년 젊은 시절 지장을 보았던 동시대 지주시(池州市) 청양현 의 은둔거사인 비관경(費冠卿)이 스님의 입적 후 19년 뒤에 그 때의 일을 기록한 '구화산화성사기(九华山化城寺記)'와 이용(李庸)이 편찬한 '구화산지(九华山志)' 등에 기록되어 있다. 김교각 스님이 신라 어느 왕의 자손이라는 기록은 없으나 비관경의 기록에 있는 출생 연대 및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유추해보면 스님은 서기 697년 신라 32대 효소왕 4년 서라벌 궁궐에서 태어난 김충칭(重慶), 부친은 후에 제33대 성덕왕이 된 신문왕의 둘째아들 흥광대군 효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은둔거사 비관경(費冠卿)이 스님의 입적 후 19년 뒤에 쓴 '쥬화산화성사기(九华山化城寺記)'의 기록에 의하면, " 산이 울면서 허물어 졌고 돌이 굴러 내려오며 하늘에서는 요란한 천둥소리가 나드니 지장은 그만 시적(示寂)하였다. 승려들이 왔으나 말이 없었고, 절안의 종을 치니 종소리가 나지않고 종이 떨어졌으며, 비구니(여승)가 입실하자 당(堂)의 서까래가 세토막으로 부러져 버렸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지장이 신(神)으로 변하여 그렇게 한 것이라고 믿었다. 제자들이 지장의 가부좌한 시신을 함에 넣어두었다가 3년이 지난 후 탑에 봉안하고자 열어보니 지장의 안색은 생시와 다름없었고 팔다리를 쳐드니 뼈마디에서 금사슬 소리가 났다. 불경에는 금사슬 소리가 나면 보살이라고 하였다(經云菩薩鉤鎖 百骸鳴이). 밤이되면 지장의 탑에서는 불빛이 발광하여 번쩍번쩍하였다."
이같이 지장이 신광령(神光嶺)에서 최초의 등신불(等身佛)이 된 이래 구화산에서는 1200여년 동안 아홉 등신불이 출현하였다. 그 중 단연 해옥(海玉) 무하(無瑕)선사(1513 ~ 1623)가 으뜸이었다. 명(明)나라 때의 인물인 무하선사는 24세에 오대산으로 출가하여 천하를 만행하다가 지장을 동경하게 되어 구화산으로 들어와 복호(伏虎)동굴에서 야생열매로 굶주림을 달래면서 수십년 동안 정진한 고승으로, 특히 28년 동안 자신의 혀를 깨물어 낸 피와 금가루를 섞어 화엄경 81권을 필사하니 사람들은 이를 혈경(血經)이라 부르며 한없이 신심(信心)을 내었다.
무하는 126세에 이르러 앉은채 열반에 들었는데 돌항아리에 넣었던 시신을 3년 후 꺼내니 그 옛날 지장의 모습과 똑같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명(明) 숭정(崇禎)은 무하를 '응신보살(應身菩薩)'에 봉하고 금가루를 하사하여 등신불을 도신(塗身)케 한 뒤, 절을 확장하여 '백세궁(百歲宮)'으로 부르게 했던 것이다.
구화산의 개산조가 지장이라면, 무하는 중흥조가 된다. 무하가 구화산에 들어와 지장의 등신불을 남대 신광령에서 찾아내 만천하에 다시 알리면서 지장신앙을 크게 부흥시켰기 때문이다.
무하 이후에 나타난 등신불이 된 고승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구화산으로 출가하여 20여 년 동안 고행한 기원사 방장 융산(隆山, 1757 ~ 1841), 청대 고승 법룡(法龍, 1812 ~ 1909), 청대 고승 상은(常隱, 1818 ~ 1909), 근대 고승 정혜(定慧, ? ~ 1909), 근대 고승 화덕(華德, 생몰미상), 쌍계 운무차를 만들어 지장의 금지차 맥을 이은 대흥(大興, 1894 ~ 1985), 현대 고승 자명(慈明, 1904 ~ 1991), 현대 고승 명정(明淨, 1928 ~ 1992)과 그 밖에 비구니(여승)인 인의(仁義, 1911 ~ 1995) 등이 지장보살의 화신이 되어 천년 전 신라인 김지장 스님의 법맥을 지금도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잇고 있다.
세상의 강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를 이루듯이 천 강에 천 개의 달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더라도 실상의 달은 언제나 하나듯이 만법은 하나로 돌아 간다(萬法歸一). 때문에 등신불이 된 역대 중국 고승들 뿐만 아니라 연화불국(蓮花佛國) 구화산을 찾는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미국인, 인도인, 동남아인들 등 수 많은 참배객들 모두가 김지장보살을 지장왕보살로 부르며 해마다 수십만 명씩 귀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최근에 중국 측에서는 좌대와 불신, 광배를 포함 2.5m 규모의 김교각 스님 입상을 제작하여 2007.11.20 안후이성(安徽省) 지주시 주화산 육신보전(月身寶殿)에서 ‘김교각 지장보살 한국봉안’을 위한 중국정부 차원의 공송(恭送) 법회를 봉행하였고 다음날 한국으로 운송되어 2007.11.23 서울시 삼성동 봉은사에서 ‘김교각 지장왕보살 입상 한국봉안 한중합동법회’를 개최했으며 김교각스님의 입상은 동국대 정각원에 모셨다.
얻었다 해도 본래 있었던 것이고(得之本有)
잃었다 해도 본래 없었던 것이다(失之本無)

4, 구화산(九華山)에서 등신불(等身佛)이 나오는 이유
무하화상의 육신불을 모셔놓은 백세궁에서 나한전으로 오르다 보면 구화산 99연봉들이 만들어 놓은 힘찬 산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들 연봉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마치 부처가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중국인들이 말하는 '천연수불(天然睡佛: 자연이 만든 잠자는 부처)'이 그곳이다. 산줄기를 세워놓고 보면 영락없는 부처모습으로 이목구비가 아주 뚜렸하다. 이 천연수불이 만들어 내는 모든 기(氣)가 천연수불에서 뻗어 내려온 중출맥(中出脈)을 타고 시왕봉으로 흘러든다. 바로 민원에 있는 봉황송이 날아들려고 하는 그곳이다. 때문에 이곳 고대경배(古臺經拜)에서 침식을 잊어가면서 주야(晝夜)로 독경했었던 김교각이 그 모든 기를 받아 지장보살의 화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기 때문이다. 백세궁에 들어서면 이곳을 거쳐 흘러가는 힘찬 氣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같은 연유로 구화산에서 배출된 16구의 등신불 중 현재까지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등신불은 오로지 김교각의 등신불과 무하의 등신불뿐인 것이다. 하지만, 김교각의 등신불은 이제 그 기(氣)가 대원문화원의 김교각 지장왕보살상으로 흘러들어 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존재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5, 찾아가는 길
구화산을 찾아 가는 방법은 상해로 들어 가서 항공편이나, 기차 혹은 버스를 이용하여 내려가는 방법과 인천 - 황산 직항편을 이용하여 황산으로 간 후 버스나 기차를 이용해서 가는 방법이 있다.상해로 들어 갈 경우, 상해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남경, 황산, 합비나, 지주공항으로 간 후 차량을 이용하면 된다. 남경은 구화산에서 220km, 합비는 198km, 황산은 143km, 지주공항은 20km 떨어져 있는데, 지주와 남경, 합비, 황산에서 구화산까지 모두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육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먼저, 기차로는 지주, 남경, 합비, 황산역에 내려서 버스를 갈아 타고 구화산까지 갈 수가 있고,
대중버스를 이용할 경우에는 상해, 남경,합비, 황산, 무한,항주, 녕파, 소주에서 모두 직통버스가 있다. 이경우 구화산여행사를 이용하면 이들 지역에서 구화산까지 가는 직통버스를 쉽게 예약 이용할 수가 있어서 좋다.
구화산 관광은 주변 관광지와 연계하여 관광하는 게 편리하고 좋은데,
(1) 먼저, 황산을 둘러본 후 태평호를 들러보고 구화산을 순방하는 양산일호지려(兩山一湖之旅)가 있고,
(2) 고도(古都)인 남경으로 간 후 구화산을 둘러보고 서호(西湖)를 구경하는 경전지려(經典之旅)가 있으며
(3) 고도인 남경으로 들어 간 후 고성(古城)인 지주성(池州省)을 돌아본 후 구화산(經地)과 여산(麗山)을 돌아보는 장강
문화지려(長江文化之旅)도 있고,
(4) 명성(名城)인 상해(上海)로 들어 가서 명호(名湖)인 천도호(千島湖)를 관광한 후 명산(名山)인 황산(黃山)을 구경하
고 도자기로 유명한 명진(名鎭)인 경덕진(景德鎭)과 경지(經地) 구화산(九華山) 관광 후 고도(古都) 남경(南京)으로
가서 옛 문화를 감상하는 문화고찰체험지려(文化考察體驗之旅)가 있는 바, 시간여유가 있다면 이중 문화고찰체험지
려가 가장 중국을 잘 알 수 있는 여행코스다.
* 문의: 구화산풍경구관리위원회(九華山風景區管理委員會) - 전화 + 86 - 566 - 2821646
홈페이지: www.jiuhuashan.com.cn

 

지인의 글 옮겨 놓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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