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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벼리가 으뜸 / Guidelines

벼리가 으뜸/ Guidelines


벼리가 뭐지? 순수한 한글인데, 내 한문(漢文)에 대한 그 첫 번째의 질문이 그것이었다. 앵무새처럼 “하늘 천, 따지” 하면서 천자문의 글자를 외우기만 하다가 기강(紀綱)을 바로 잡는다는 말이 ‘벼리 기(紀), 벼리 강(綱)’이다. ‘벼리가 뭐지?’ 작은 시골의 대답은 어린 내게 분명하지 못했다. 방학에 외가를 갔다, 주변 마을 청년들이 아침마다 한문 책을 끼고 와서 소학과 논어 등을 외할아버지께 배우기에 나도 여쭈었다. “벼리가 무슨 뜻입니까?” “벼리는 ‘벼리 줄’이라고 도 하는데, 으뜸 줄이다. 그물에는 수많은 작은 그물코가 있지만 그것들은 다 맨 위의 별 줄에 매여서 연결되어있는 법이니, 그것을 벼리라 한다. 그 벼리를 들면 모든 그물코는 다 그 으뜸 줄에 끌려오도록 되어 있다. 모든 일과 사물에는 그 으뜸이 되는 벼리가 있어야 하고, 그 벼리를 잡으면 그 모든 것들이 다 끌려오게 되므로 가장 중요한 것이 벼리가 되느니라.”
우리 속담에도, “그물이 삼천 코라도 벼리가 으뜸이다.” 바다의 큰 그물도 그러한데 우리가 시골에서 투망(投網) 혹은 초망(抄網)하던 걸 생각하면 쉽다. 그물을 원뿔 모양으로 만들어서 물에 던져 그 속에 든 물고기를 잡을 때 그 으뜸 줄에 그물코들이 다 연결되어 끌리지 않던가. 벼리는 굵은 줄에 그물을 묶으니 물 흐름을 막아서 고기를 잡는 것이다(綱以大繩屬網 絶流而漁者也). 많은 그물코를 꿴 굵은 줄이 벼리이니 즉 강(綱)이다. 그래서 말과 글에는 반드시 논강(論綱)이 있어 기본적인 명제(命題)가 되고, 하늘이나 제왕(帝王)은 반드시 건강(乾綱)이 있으니 하늘은 만물을 주재하는 벼리가 되고 제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방침을 삼는 것이며, 인간 사회는 삼강(三綱)이 있으니 유교의 근본이고 도의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떳떳이 지켜야 할 것이 강상(綱常)이요 동양 윤리의 근본이었다. 삼강 오륜(三綱五倫)이 사회생활의 방침이요 윤리의 으뜸 줄이며 벼리였던 것이다. “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되고(君爲臣綱), 아버지는 자식의 벼리가 되며(父爲子綱), 남편은 부인의 벼리가 된다(夫爲婦綱).”
“그물에는 벼리 있어서 가닥이 어지러워지지 않는 것과 같고, 농사일에 힘써서 가꾸면 역시 추수가 있는 것과 같다(若網在綱有條不紊), 若農服田力穡 乃亦有秋)”고 서경(書經 盤庚上)에도 비유가 있다. 그물[網]의 벼리[綱]를 예로 든 고대의 은(殷)나라 임금 반경(盤庚)의 말. 말의 조리가 바로 그물코를 한데 꿴 벼리와 같고, 농사일에 힘쓰는 것이 추수의 벼리가 된다는 예(例)로 삼은 표현이다. 조리가 있는 말과 글에도, 정책과 지도력에도, 행동의 윤리와 지침에도 벼리가 있어야 한다. 그 으뜸 줄을 잡지 않으면 질서도 없고 기획도 없으며 사회의 기강도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은 일찍이 전장에 나아가서 몸소 떨쳐 일어나 적진으로 공격하면서 선언했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한다. “대개 옷깃을 떨쳐야 갓 옷이 바르게 펴지고 벼리를 들어야 그물이 펴진다고 들었으니, 제가 그물과 옷깃이 되겠습니다(盖聞振綱而裘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그것은 또 더 옛날 한비자(韓非子)에 ‘그물을 잘 펴는 것은 그 벼리를 끄는 것(善張網者引其綱)’이라는 말과 순자(荀子)의 ‘그물을 끌고 옷깃을 든다(提綱挈領)’ 는 데서 나왔을 것이다. 결국 벼리가 으뜸 줄이기 때문에 벼리 유(維), 벼리 륜(綸), 기강(紀綱) 등의 벼리가 뜻하는 바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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