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물의 가치 고양(價値高揚)
묵은 집에는 흔히 한문 책 한두 권은 있었다. 천자문이든지 축문이나 가승(家乘), 족보 같은 것이 시골 집에선 종종 볼 수 있었으니, 이런 유(類)를 대개 고문헌(古文獻)이라고 부른다. 그걸 뜯어다 닥종이로 옛날 엽전을 싸서 재기를 만들어 차기도 했고 더러는 방의 흙벽을 도배하는데 쓴 경우도 있었다. 신교육 제도로 한문 교육이 없어지면서 한자(漢字)를 아는 사람이 점점 세상 떠나서 이제는 그런 옛날 방식으로 한문 공부한 사람이 극히 적다. 그로서 한문 고문헌들이 푸대접을 받고 골동품 상인들의 수집 거리로 흘러가고 벽장 깊숙한 데 묻히게 되었으니 그 무관심과 푸대접은 그만큼 우리가 어리숙해서다.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고귀한 역사적 사료(史料)와 문화적 증거물인데 말이다. 나는 오늘 오후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성씨총연합회가 마련한 종중(宗中) 고문서 세미나에서 동영상으로 진천송씨 종중 고문서 관리와 번역이라는 주제로 20분간 사례와 내 견해를 발표할 참이다. 우리 기록물의 가치 고양(高揚)을 위해서.
미국에서는 1934년에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로버트 코너((Robert D. W. Connor) 기록물 전문인[airchivist]을 미연방 기록물 담당관으로 임명하면서 시작하여 이후 기록학(archivistics)이라는 학문 분야가 생겨났지만,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기록학에 관심을 일깨우는 것 같다. 실상 그 기록학은 도서관학과로 대개 우리에게 알려진 도서학(圖書學)이 있으나 흔히 출판된 책이 도서관학의 전문이라면 기록학은 정부나 단체 개인의 가치 있는 기록을 수집 관리하고 보전하며 안내하는 등의 기록물 연구 분야이다. 그래도 우리의 한문 고전 보존과 활용과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것은 한문 기록학이라고 할 수 있고, 그 기록 관리가 있겠으나 아직 국제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개념화를 하는 지는 내가 모르겠다. 역사와 문화적 가치가 있고 고증과 증거물로 보존하며 거기서 역사학과 문화적 가치를 창출할 수가 있기에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늦었지만 우리 고전 문화 사업으로는 1980년대에 의식 있는 분들이 민족문화추진회를 결성하고 더 잃어버리기 전에 옛 문서들을 모아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총刊)이라는 이름으로 500여권의 한문 영인본의 방대한 책이 출판되었다. 신라 말의 최치원(崔致遠)의 문집부터 고려와 조선을 내려오면서 수천 가지 문집을 조사하여 학술적 가치의 우선순위로 골라서 근 1,300 명의 문집이 거기 들어있다. 그 중에서 내가 번역한 것은 우리 성씨의 한 분 것일 뿐이지만 지금 그 번역서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략 우리 한반도의 역사적으로 상당한 우리의 사상과 문화가 응축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민족문화추진회가 발전하여 지금 고전번역원이 되어서 정부가 전적으로 지원하게 되었고, 고전 번역의 전형이 되었다. 이어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국학진흥원과 같은 기관이 설립되고 역시 고전 문화를 위한 전문적 사업으로 한문 고전을 꾸준히 수집 보존하며 교육과 번역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물론 대학들의 한문학과나 역사학, 국문학과에서도 우리의 역사와 문화 기록이 오랜 세월 한문으로 되었기에 역시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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