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月旣望/ 팔월기망
기망은 보름이 하루 지난 다음날인 16일의 이름이다. 옛글에는 음력 초하루는 삭(朔)이라 하고 15일의 보름은 망(望)이라 했다. 그래서 초하루와 보름날이 삭망(朔望)이고, 한 달 중의 중요히 여긴 그 첫날과 한가운데 날로 표현한 것이다. 그처럼 아름다운 보름날이 지난 그 다음날도 보름달 만큼은 살짝 덜 크지만 여전히 밝고 큰 열엿새 날 16일도 아끼고 소중하게 즐기려고 했던 흔적이 있지 않던가. 대개 보름날은 굉장히 중요한 날로 여겨서 명절이나 제사, 특별한 날이라 우선순위의 대사(大事)로 지키고, 차선(次善)의 좋은 날인 열엿새도 여전히 밝은 달을 쳐다보면서 선비들이 모여서 시회(詩會)를 열거나 문중(門中)의 어른들이 재실(齋室) 같은 데서 동족의 화수회(花樹會)로도 모여서 시주(詩酒)를 나누며 즐겼다.
기망(旣望)은 이미 기(旣)자를 보름 망(望)자 앞에 붙였으니 기왕에, 이미 지났다는 말이므로 보름날[望]이 지나간 다음날이라는 뜻이다. 송(宋)나라 때 소식(蘇軾)의 유명한 적벽가(赤壁歌)의 뱃놀이도 임술(1082년) 가을 7월 기망(壬戌之秋 七月旣望), 곧 열엿새 날에 모였던 일이다. 조선의 선비들도 적벽가를 대개는 다 읽어서 기망에 운치를 즐긴 흔적이 종종 나타난다. 만력신축 춘삼월기망(萬曆辛丑/1601年 春三月旣望)에 서대문밖 청파동(靑坡洞)에 살던 가난한 선비 유영(柳泳)의 운영전(雲英傳), 로맨스 소설 스토리가 기망(旣望) 달밤에 시작된다. 그가 문안으로 들어가 초라한 몰골에 행인들의 조소를 무릅쓰고 무너진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수성궁(壽聖宮) 뒤뜰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무너진 궁궐 담장에 기왓장 부스러기에도 늦봄의 낙화(落花)에 소동파(蘇東坡)의 시구인 ‘사방에 꽃잎 마구 떨어졌으나 쓸어내는 사람도 없네(滿地落花無人掃)’ 라는 시구를 읊으며 봄을 즐겼다. 차고 간 술병 기울여 홀로 다 마시고 잠이 들었다가 우연히 만난 청춘 한 쌍과 운치 있는 시가(詩歌)의 스토리가 시작된다. 그 세팅도 소식의 적벽가처럼 기망이었던 것이다. 소설의 배경은 세종의 3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궁녀 안영(雲英)의 과감한 러브 스토리(Love Story)를 시문(詩文)으로 전개하면서 몽유소설(夢遊小說)의 형식을 취했다.
실제 그런 기망의 행사 중에 지금도 지키는 것이 우리 진천송씨(鎭川宋氏)에는 완주(完州)의 우산 종중(紆山宗中)에 이어오고 있다. 광해군(光海君) 때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고, 백사(白沙 李恒福)와 월사(月沙 李廷龜)의 친구이기도 했던 표옹(瓢翁 宋英耈/ 1556-1620)이 시작한 전통이다. 선대를 기리는 망모당(望慕堂)을 짓고, 해마다 음력 7월 기망이면 인근의 선비들을 청하여 종일 시를 읊으며 술을 나누었던 소쇄일(瀟灑日)의 유속(遺俗)이다. 나도 몇 차례 참여했지만 지금은 제시(題詩)는 생략되고 식사와 술은 있어 대개는 문중과 씨족이 모이는데, 400년 전통이 전해오기를, 온종일 시주를 즐기던 선비들이 기망(旣望)의 달빛 아래 흰 두루마기와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거나한 기분으로 거기 광암리(廣岩里) 푸른 들길로 돌아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기망의 운치(韻致)가.
기망은 보름이 하루 지난 다음날인 16일의 이름이다. 옛글에는 음력 초하루는 삭(朔)이라 하고 15일의 보름은 망(望)이라 했다. 그래서 초하루와 보름날이 삭망(朔望)이고, 한 달 중의 중요히 여긴 그 첫날과 한가운데 날로 표현한 것이다. 그처럼 아름다운 보름날이 지난 그 다음날도 보름달 만큼은 살짝 덜 크지만 여전히 밝고 큰 열엿새 날 16일도 아끼고 소중하게 즐기려고 했던 흔적이 있지 않던가. 대개 보름날은 굉장히 중요한 날로 여겨서 명절이나 제사, 특별한 날이라 우선순위의 대사(大事)로 지키고, 차선(次善)의 좋은 날인 열엿새도 여전히 밝은 달을 쳐다보면서 선비들이 모여서 시회(詩會)를 열거나 문중(門中)의 어른들이 재실(齋室) 같은 데서 동족의 화수회(花樹會)로도 모여서 시주(詩酒)를 나누며 즐겼다.
기망(旣望)은 이미 기(旣)자를 보름 망(望)자 앞에 붙였으니 기왕에, 이미 지났다는 말이므로 보름날[望]이 지나간 다음날이라는 뜻이다. 송(宋)나라 때 소식(蘇軾)의 유명한 적벽가(赤壁歌)의 뱃놀이도 임술(1082년) 가을 7월 기망(壬戌之秋 七月旣望), 곧 열엿새 날에 모였던 일이다. 조선의 선비들도 적벽가를 대개는 다 읽어서 기망에 운치를 즐긴 흔적이 종종 나타난다. 만력신축 춘삼월기망(萬曆辛丑/1601年 春三月旣望)에 서대문밖 청파동(靑坡洞)에 살던 가난한 선비 유영(柳泳)의 운영전(雲英傳), 로맨스 소설 스토리가 기망(旣望) 달밤에 시작된다. 그가 문안으로 들어가 초라한 몰골에 행인들의 조소를 무릅쓰고 무너진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수성궁(壽聖宮) 뒤뜰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무너진 궁궐 담장에 기왓장 부스러기에도 늦봄의 낙화(落花)에 소동파(蘇東坡)의 시구인 ‘사방에 꽃잎 마구 떨어졌으나 쓸어내는 사람도 없네(滿地落花無人掃)’ 라는 시구를 읊으며 봄을 즐겼다. 차고 간 술병 기울여 홀로 다 마시고 잠이 들었다가 우연히 만난 청춘 한 쌍과 운치 있는 시가(詩歌)의 스토리가 시작된다. 그 세팅도 소식의 적벽가처럼 기망이었던 것이다. 소설의 배경은 세종의 3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궁녀 안영(雲英)의 과감한 러브 스토리(Love Story)를 시문(詩文)으로 전개하면서 몽유소설(夢遊小說)의 형식을 취했다.
실제 그런 기망의 행사 중에 지금도 지키는 것이 우리 진천송씨(鎭川宋氏)에는 완주(完州)의 우산 종중(紆山宗中)에 이어오고 있다. 광해군(光海君) 때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고, 백사(白沙 李恒福)와 월사(月沙 李廷龜)의 친구이기도 했던 표옹(瓢翁 宋英耈/ 1556-1620)이 시작한 전통이다. 선대를 기리는 망모당(望慕堂)을 짓고, 해마다 음력 7월 기망이면 인근의 선비들을 청하여 종일 시를 읊으며 술을 나누었던 소쇄일(瀟灑日)의 유속(遺俗)이다. 나도 몇 차례 참여했지만 지금은 제시(題詩)는 생략되고 식사와 술은 있어 대개는 문중과 씨족이 모이는데, 400년 전통이 전해오기를, 온종일 시주를 즐기던 선비들이 기망(旣望)의 달빛 아래 흰 두루마기와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거나한 기분으로 거기 광암리(廣岩里) 푸른 들길로 돌아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기망의 운치(韻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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