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과 한국 개신교 / 韓語和改新敎
훈민정음은 1445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우리 고대의 소위 가림토(加臨土), 한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의 신라 때부터 이두(吏讀)라고 했던 향찰(鄕札), 구결(口訣)도 있었으니, 우리말을 표현하려던 오랜 노력이었음이 분명하지만 온전한 언어를 체계화한 것은 아무래도 한글이 완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글이 민족의 문명을 확실하고 독특하게 활용하도록 길을 열어준 우리말의 언어로 정착되었다. 물론 말은 이미 발달되어 있었던 것이나 그것을 표기하여 바르게 전달하는 기록 언어를 합쳐서 완전한 말과 글이 어우러진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글이 다른 많은 언어와 비교할 때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기록 문자라고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놀라운 발명을 우리 스스로 그 진가를 일찍부터 널리 실용하지 못했으니 근 5백 년은 우리의 문명 진보가 늦어진 셈이었다.
인습에 젖은 고정관념이 새로운 변혁에 거부감이 있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쉽게 우리의 말을 표기할 수 있어 백성의 느낌을 전달하고 생각을 쉽게 교환하는 손쉬운 연모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에 익었다는 옛날의 무딘 연장을 그대로 고집하였으니 지나간 일일지라도 안타까울 뿐이다. 한문에 젖은 지식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었을 테니까. 그거야 어느 사회나 비슷하니 라틴어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그걸 빨리 포기할 수가 없어 중세기는 신도들이 읽을 수 있도록 성서조차 번역하지 않았고 사제들만이 독차지한 성서였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그 많고 어려운 언어를 어찌 생활에 바쁜 농부와 아낙네가 다 깨칠 수가 있었겠는가? 우리의 문맹율은 해방 후까지도 너무나 높았다. 소수의 지식인 외에는 자기의 뜻을 글로 소통할 재주가 없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으나 속으로부터 표출하고자 하는 욕망은 강렬했을 것이니 해방 후에 한글 터득이 급속도로 늘어났고, 한글로 읽고 쓰기에 얼마나 쉽고 편리했는가. 우리나라만큼 지금 문맹률이 낮은 나라가 세계 어디에서 그리 쉬울 수가 있다고 들었는가?
모든 공식 문서가 오로지 한문으로만 기록하고 전달되었으니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부 통치자들과 한문을 배운 소수 기득권자들의 독차지였다. 조선이 망하고 나서야 한글이 제대로 살아 숨 쉴 수가 있었으니 비로소 한글이 되살아난 것이다!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글을 알고자 하는 그 소원이 마침내 터져 나올 수가 있었고, 그것을 일찍이 간파한 것이 외국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들이었다. 우리들 자신은 속에 있어서 그 가치의 윤곽을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때 외국인이 와서 보고는 가치의 핵심을 곧바로 터득했으니 바로 개신교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였다는 사실이다. 재빨리 한글로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으니 그들은 우리 민족에게 숨겨져 있던 보화를 발견한 셈이다. 그리하여 한글의 미디어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가 먼저 한글 사전을 일본에서 착수하여 만들었고, 그것을 차츰 보완 재판하다가 거듭 나오면서 한글이 발전하게 되었다. 일찍이 기독교서회를 창립하여 한글로 된 문서 선교에 앞장선 것이 개신교였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내 어머니께서 한글도 서투르셨는데 6.25이후에 교회에 나가시면서 성경 한 권을 사신 다음부터는 늘 읽으시면서 한글이 아주 능통하게 되신 것을 어린 내가 곁에서 지켜본 증거이다. 내 대학 시절까지도 한국 최대의 서점이 종로서적센터였고, 거기 기독교서회가 가장 큰 한국의 출판사의 하나가 아니었던 가. 천로 역정 같은 기독교 소설만이 아니라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 등의 서양 동화 같은 서양 문물의 교양 서적들을 계속하여 출판하여서 실로 문화의 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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