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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京城八門/ 서울의 8대 성문

京城八門/ 서울의 8대 성문
 
옛날 말로 나는 지금 서울 문안[門內]에 산다. 4대문, 또는 서울의 8문 안이라는 말이다. 서울 근교에 살던 사람들은 문안에 간다고 했고, 지방에서는 멀리 서울을 간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사는 서울 문안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의 일환으로 불교의 승려(僧侶)는 이 문안에 들어올 수가 없었기에 불교에서는 경성 8문 안에 사찰을 세우는 일이 너무나도 큰 숙원이었다. 조선이 망하고 나서 조계사(曺溪寺)의 전신인 각황사(覺皇寺)가 지금의 조계사 옆 자리에 세워져서 1954년에 조계사로 개명 되었을 정도이니, 조선 시대 내내 승려는 천민 계급이라 얼마나 한이었겠는가. 임금이 사는 궁궐과 정부 각 부처와 관아(官衙)가 있는 곳, 한가운데에 종을 울리는 보신각(普信閣)이 있어 종루(鐘樓)라고 도 하는 서울 한 길에 있어 종로(鐘路)거리가 되었다.
 
그 사대문이 바로 정 남쪽에 속칭 남대문(南大門)인 숭례문(崇禮門), 정 북문(正 北門)인 숙정문(肅靖門), 정 동쪽의 속칭 동대문(東大門)인 흥인문(興仁門), 정서(正西)의 속칭 서대문(西大門)인 돈의문(敦義門)이다. 숙정문은 북악산 능선에 높이 있어 늘 닫혀 있었는데 사람들이 통행 할 일도 없었고, 돈의문인 서대문은 세종 이후 새로 지어서 새 문[新門]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1915년 일정 때 헐고는 지금 그 자체가 없어졌다. 남대문과 동대문은 우리가 지나다녀서 익숙하지만 그것도 옆으로 돌아다녀서 실제로는 지금 통행 문으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 4개의 대문 사이사이에 작은 문이 있으니 동북의 동소문(東小門)인 혜화문(惠化門)이 없어졌다가 근년에 새로 언덕 위에 세웠고, 서북쪽 창의문(彰義門)은 지금도 보행으로 다니도록 되어 있다. 속칭 남소문(南小門)인 동남의 광희문(光煕門)과 서남의 서소문(西小門)인 소덕문(昭德門)은 실제 문으로 이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이름들은 종종 언급되고, 그 지역 호칭에는 남아있다. 일찍이 조선 중기에 펴낸 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경성 팔문(京城八門)을 그렇게 소개했다.
 
그 사대문의 의미는 유가(儒家)의 핵심인 오륜(五倫) 곧 오상(五常)의 원리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가운데의 보신각에 신(信)은 소식을 전하는 종소리를 내고, 동서남북에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대문 이름을 만든 것이 숭인, 돈의, 숭례, 숙정문이다. 지(智)는 지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으로 숙청문(肅淸門)이라 했다가 후에 숙정문(肅靖門)이 되었다고 한다. 동시에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도 담았으니, 동서남북은 춘하추동(春夏秋冬)과 연관하여 동쪽은 봄, 서쪽은 가을, 남쪽은 여름, 북쪽은 겨울이다. 오행(五行)으로는 동은 목(木), 서는 금(金), 남은 화(火), 북은 수(水), 가운데가 토(土)의 뜻을 지닌다. 서울에는 인의예지신이 가득하고, 동서남북에 만물의 원소인 오행(五行)을 함축하고 있으니 소 우주의 이상 세계를 담아 놓았다. 생각하면 이토록 서울의 여덟 문의 이름이 참으로 깊지 아니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