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타령 / 八字打令
팔자는 여덟 글자이고, 타령은 늘 불러 대는 노랫 가락이라는 말인데, 팔자는 ‘사주팔자(四柱八字)’라는 뜻이고 타령은 언제나 못 잊고 다시 또 그 익숙한 노래를 하염 없이 불러 대면서 한탄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하는 진부한 반복의 행위를 뜻한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다. “다 자기의 팔자야.” 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어쩌지 못하고 포기하면서 수용해야만 하는 숙명을 탓하고, 또 넉 두리 하면서 되풀이할 뿐이다. 각설이 타령을 밥을 얻어먹을 때마다 되풀이하여 불러 대는 것처럼 궁색한 처지에선 또 거듭 거듭하는 타령 노래가 되기 때문이다. 운명을 탓하며, 팔자의 넋두리를 또 되 뇌는가? 우리가 아는 팔자(八字)란 한 사람의 운명은 그가 태어난 생년(生年)과 생월(生月), 생일(生日)과 생시(生時)의 8글자에 달려 있다고 믿는 통속적인 동양의 오랜 관념인데, 그것을 소위 운수의 4기둥과 같다고 하여 태어난 연, 월, 일, 시(年月日時)를 일컬어 사주(四柱)이고, 혹은 그 사주의 여덟 글자를 사주 팔자(四柱八字)라 고도 한다. 그래서 아이가 성장하여 결혼을 할 때면 그 사주 단자(四柱單子) 곧 팔자(八字)를 적어서 교환하므로 궁합을 맞추어서 혼사를 정하였던 우리의 과거가 있다.
중국의 근대 언어 학자였던 손금표(孫錦標/ 1856-1927)의 천문, 지리, 가족 등 사회적 통속용어를 모은 ‘통속상언소증의 통속편(通俗常言疏證, 通俗編)’에 속담인 ‘팔자는 두 삐침 속에는 없다(八字不見兩撇)“에 대해 설명한다. 여덟 ’八‘자(字)의 두 삐침 속에는 8글자인 팔자(八字)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송 나라 주희(朱熹/ 1130-1200)가 제자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편지에도 언급했다, “성현들이 이미 팔자를 해결했다,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터득하지 못할 뿐이니, 도리어 바깥으로 날뛴다(聖賢已是八字打開了, 但人自不領會, 却向外狂走耳).”
조선의 정치 철학의 이념을 장악하다시피 했던 주자학(朱子學)을 신봉했는데도 주자의 이 뜻을 심각히 받아들이지 못한 선비들이 너무나 많지 않았던 가? 팔자 타령보다는 주자의 이 팔자일별(八字一撇)부터 옳게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八자의 한 삐침도 모르면서[八字還沒一撇] 자기의 팔자를 풀려는 어리석은 짓이 된다. 동양의 도참설의 중심에는 유불선에 다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니, 화엄경에, 노장 사상에, 주역에 있다는 것이지만 실상 그 진수보다 사람들은 예언서로 해석하기를 끊임없이 좋아하고 있다, 특별히 한국에서. 심지어 기독교가 들어오자 예언 기도와 같은 기독교 도참설은 재림 예언이 자꾸 일어났고 신앙촌 같은 유토피아 공동체까지 생겨 나왔으니, 역시 같은 운명론이다. 실상은, 여덟 팔(八)의 양쪽으로 벌린 두 삐침 속에는 팔자(八字)가 결코 없다! 공연한 허구일 뿐이다. ‘팔자는 내할 나름이다’ 라는 말처럼 팔자의 운명에 내 인생이 달린 게 아니라 내 인생은 내가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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