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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개소 발괄 누가 알아주랴 / 犬牛白活 有誰存察

개소 발괄 누가 알아주랴 / 犬牛白活 有誰存察

개나 소나 하듯 두서없이 마구 지껄이는 하소연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속담이다.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속담 모음집 이담속찬(耳談續纂)에도 소개되었으니 조선 후기에 우리 사회에 익숙하던 표현이었다. 발괄은 조선 후기에 한자(漢字)로 표기하고 우리말로 읽은 이두(吏讀)이니 ‘백활(白活)’로 표기하고 ‘발괄’로 읽는 말이다. 그것은 곧 하소연이라는 뜻인데, 사또나 감사(監司)에게 청구하는 소송의 소장(訴狀)과 같은 기능으로 공식 용어는 소지(所志)였으니 마음의 품은 사연을 요청하는 바를 말한다. 이 속담은 아무리 억울한 사정의 발괄일지라도 두서(頭緖)가 있어야 하고, 절차나 격식이 제대로 갖춰져야 한다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요새는 하도 많은 법을 국회의원들이 만들어내는 바람에 변호사나 법조인 자신들조차도 그 번다한 법률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으니 전문 분야의 변호사들이 있어야 한다. 심지어 그 분야의 전문 변호사도 다 알 수가 없어 법전이나 판례 등을 인터넷과 데이터에서 찾아야 할 정도이다. 그래서 법도 많은 세상에는 법적 다툼도 많으며 거기에 따라 신경도 써야 하고 엄청난 에너지와 돈을 써야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해서, 걸핏하면 내용 증명 입네, 전화 내용이나 대화를 녹취 한다느니, 증거인멸 등의 법적 용어들도 우리 귀에 익숙해질 정도가 아닌가. 단순한 행정과 사법 절차로 현감이나 감사(監司)가 단독으로 처리하던 조선 시대에도 소장과 같은 발괄의 형식이 중요했던 것이다. 집안에서 한 번쯤은 조선 후기에 산송(山訟)이나 채송(債訟)에 연루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수도 있다.

한문고전을 번역하는 동안에 때때로 그런 소지문(所志文) 종류의 고문서 번역 의뢰를 받아서 나도 번역해준 적이 있다. 거기에는 한문(漢文)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우리 방식의 이두(吏讀)도 알아야 하는데, 비교적 이두는 배우기가 쉬워서 다 익히지 않아도 이두 사전을 통하여 대개 해독할 수가 있다. 여기 ‘백활(白活)’이라는 단어가 한문에 나올 때 한자식으로 해석하거나 발음하면 안 되는 것이 그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니 ‘발괄’이라고 읽어야 하고 그 뜻은 한자로 소지(所志)가 되며, ‘소장(訴狀)이나 ’하소연‘이라는 뜻의 청원서나 호소문이라고 하면 된다. 벼슬아치의 사대부(士大夫)가 청원서를 직접 올리는 소지(所志)는 단자(單子)나 상서(上書)라 하고, 여럿이 올리면 등장(等狀)이라 하며, 고을 수령이 해결해주지 않으면 관찰사에게 청원을 올리는 경우는 의송(議送)이라 했으니 지금의 상소(上訴)와 같은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선비들이 작성한 소지(所志)는 한문으로 격식을 갖추고 말미에는 작성자의 이름과 서명(署名/ signiture)이 있는데 반해, 무학(無學)의 돌쇠[石金]나 복돌(福乭)이는 왼 손바닥을 대고 오른손으로 손가락 사이를 그림처럼 그려서 사인(sign)을 대신하여 증거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그 소지/ 발괄을 접수한 관아에서는 현감이 확인하고는 거기 여백에다 판결문을 썼으니 소위 ’뎨김[題音]‘이라고, 사또[監司]인 경우에는 ’제사(題辭)‘라고 결정을 몇 자 써서 내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