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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삼일절 순례/ 己未年 三月一日

 

 

삼일절 순례/ 己未年 三月一日

나는 103년 전의 삼일절 현장을 오늘 다시 답사, 추념 했다. 일경(日警)의 감시를 피해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당시 새로 건축 중이던 천도교 당 옆에 허름한 옛 장소에 숨겼던 현장에 먼저 갔다. 마당에는 한 그룹의 기념 행사가 진행되었고, 주변은 오가는 사람들로 어수선하며 건너편 운현궁 쪽에는 알 수 없는 농악 패의 북과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다. 지금의 조계사 자리에 있었다는 보성 인쇄소에서 거사 3일 전에 35천장을 찍는데, 옛날 식의 활판 넘어가는 털거덕 소리에 종로 경찰서 고등계 형사 하나가 이상하게 여기고 들어가서 확인하니 독립선언서가 인쇄 중이었다. 난리가 났다, 명월관과 태화관 주인 애국의 언론인 안순환은 급히 연락, 의암(義菴 孫秉熙) 천도교 대표가 그 신 형사를 고급 식당으로 청했고, 500원을 내놓으면서, “사흘만 참아주시오!” 형사는 말없이 한참 있다가 나갔다. 오랜 뒤에 알려졌지만 조선인으로 그는 신의주로 독립 운동 탐사 출장 계를 내고 서울을 떠나갔다는 것이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가 참아준 것이니 얼마나 숨은 얘기 거리가 많았을까? 그날 밤 35천 장의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싣고 재동(齋洞) 파출소 앞을 지나는데 검문에 걸렸네, 또 한 번의 위기였다. 천우신조(天佑神助)로 그때는 전기 사정도 열악했겠지, 마침 잦았던 정전이 그 순간에 일어날 줄이야! 검문 경찰은 어두워서 볼 수가 없자 그냥 통과시켰다니 까. 내가 느긋이 지금 걷고 있는 여기, 안국동 사거리에서 종로 쪽으로 꺾어 천도교 당까지 오던 당사자는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을까?

삼일절은 자유와 자주(自主)를 온 세상에 결기 차게 공포한 선언의 날이었다. 그 누구도 속박할 수 없는 하늘이 낸 인권임을 군국주의의 총 칼 앞으로 나섰던 결의 가득한 우리의 용맹이었다. 선언서에 서명한 33인 대표 손병희는 그 전날 천도교를 이끌 후계자를 정하고 당일 새벽엔 청년들에게 마지막 훈시를 했다. 16명의 기독교 대표들 중의 9명의 감리교를 이끄는 정동 감리교회 이필주(李弼柱) 목사는 그날 아침 갑자기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사유는 말할 수가 없이 비장하게 당부를 하고 나섰다. 중앙 감리교회 김창준 전도사는 결혼 1년된 아내에게 조국을 위해 가족을 맡겼다. 탑골 공원에서 거사(擧事)를 비밀리에 계획했는데 격정의 시위가 되어 탄압을 받아 희생자가 생길 것을 염려하여 대표들은 지금의 태화 사회관 자리에 있던 당시의 명월관의 분점인 태화관(太和館) 한식당 1층 산정별실(山亭別室)로 장소를 변경했다. 거기서 29명의 대표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마침내 그 막을 올렸다. 미리 경찰에 알리게 하였고 경찰은 벌써 태화 관을 둘러쌌으며, 인력거에 분산하여 대표들을 태우려 하자, 경찰을 향해 호령을 했다네, “자동차를 태워라!” 경찰은 자동차에 분승 시켜서 남산으로 연행해갔다는 것이다. 오늘은 노조(勞組) 한 패거리가 몹시 요란하게 농악대와 함께 태화관 앞으로 집결하니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의 피켓만 내 눈에 들어왔다. 귀가 아파서 나는 기념 표지판 앞에 잠시 섰다가 탑골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을 기대했지만 삼일절과 관계가 먼 노조 시위대가 그 자리를 점령할 줄이야.

오늘은 이미 작은 행사가 있었는지 흔적만 약간 남기고 공원은 썰렁했다. 191931일 오후 2시에 파고다 공원으로 보성 학교와 연희전문 학생들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모이도록 하여 피 끓는 젊은이들과 지사들이 모였는데, 정작 대표들이 오지를 않아 성급한 학생들이 태화 관으로 달려가 항의까지 하면서 다시 파고다 공원 팔각정에서 한복을 입은 누군가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오래 만에 태극기를 펄럭였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군중은 광화문 방향으로 행진 했고,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慶運宮)에는 인산일(因山日)을 이틀 앞두고 고종 황제의 시신이 있는 그 앞길에서 3(三拜)를 올리고, 대열은 지금의 서울 시청 자리에서 명동으로 향하였다. 이로서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삼천리에 퍼져 나갔으니 3월에서 4, 지방으로 시골로, 장터마다 외치게 된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5리 길의 학교로 가서 삼일절 노래도 부르면서 기념식을 했었는데, 지난해에 이어 오늘 다시 현장에서 홀로 추념 하면서 생각했다. 우리가 이날은 기념식도 하고, 기념 예배나 기념 예불(禮佛)을 하는 게 옳지 않을까? 다음엔 친구 몇 이라도 불러서 함께 하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