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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삼일절과 종교 / 유교는 어디에

삼일절과 종교/ 유교는 어디에

기미 독립 선언서에 유교 대표는 왜 하나도 없었는가? 1919년만 해도 우리나라에 대중 종교는 유교(儒敎)가 대부분이었을 텐 데도 말이다. 그 많던 유가(儒家)의 양반들은 삼일절에 다 어디로 갔을까. 삼일운동에 유교가 배제 될 수 없었으니 서울과 경상도와 전라도로 영향력 있는 유림 대표를 접촉했고, 서울의 관료와 유학의 관록이 있는 인물들과 협의하고 참여를 요청했던 기록은 넉넉히 지금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유림 대표나 유교의 이름을 내걸고 독립 선언서에는 한 명도 이름을 내지 않았단 말인가?

도산(島山 安昌浩/ 1878-1938)의 연설에서 그 까닭의 한 힌트를 짐작케 한다. “우리에게 황제가 없나요?” 라고 자문하고는, “있소!”라고 자답 한다. “여러분이 황제요!.” 그의 요지는 유교적 배경을 암시한다. 그래서 삼일운동을 시도할 때 유교적 입장은 왕정 제도를 염두에 두고서 대한제국을 회복하자는 견해가 있었던 것도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안창호는 지난날 한 사람의 황제이던 것이 이제는 만인이 황제라는 논리를 기발하게 설파한 것이므로 민주 공화제(民主 共和制)를 뜻했다.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했으니 도산도 세계적 조류를 터득하고 국민이 다 황제가, 다 주인이 되는 공화제를 의미했다고 볼 수 있고, 왕정 복고의 당시 우리의 유가적(儒家的) 정서를 읽을 수가 있다. 호남의 대표로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를 기대하고 당시 명망이 높던 애국적 유학자인 간재 전우(干齋 田愚/ 1841-1922)를 찾아갔을 때, 그는 강력하게 유교 전통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복벽(復辟) 즉 왕정복고(王政復古)를 해야 하고 단발(斷髮) 철폐와 서교 폐출(西敎 廢黜)로, 그것이 보장되지 못해 호남의 유학자 간제는 끝내 삼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남의 거유(巨儒)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1846-1919)이 참여하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서명을 하지 못한 채 기미 독립선언서는 작성 배포되고 말았다.

거기 서명한 33인은 15명의 천도교인과 2명의 불교인 대표, 그리고 16명의 기독교인 대표였으니 유교는 하나도 없다. 유교 다음으로 당시의 종교인 숫자는 불교였겠지만 그래도 2명의 대표가 이름을 올렸고, 천주교회는 개신교보다 훨씬 먼저 전래된 서양 종교였음에도 한 명의 대표도 이름이 없기는 유교와 매한가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세계적 조직으로 일본에 기울어져 있어서 권력에 항거 하지 못한다는 정책이 있었던 것 같으니 독립 운동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천도교(天道敎)는 소위 동학란(東學亂)이라고 규정했던 민중 운동 이후에 조직된 종교(宗敎)로 갑자기 일어선 우리 고유의 신생 종교인 천도교가 놀랍게 많이 참여했다. 개신 교회는 1885년에 들어와서 30년 남짓 한 선교 역사일 뿐 가장 어린 한국에서 의 종교인데 어찌 가장 많은 종교인 대표로 16명이나 많이 참여하였을까? 개신교 목사들은 희생을 각오한 선봉 자들이었을까? 실상은 삼일운동이 개신교가 앞장선 것은 사실이고, 서양 선교사들이 적극 활동하여서 해외에 빨리 이 소식을 전하고 설명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화성의 제암 감리교회 학살 사건은 캐나다 감리교회 선교사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石虎弼1889-1970) 박사에 의해 세계에 전해질 수가 있어서 역사에 크게 두드러지게도 되었고,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연희전문 등의 기독교 미션스쿨에서도 대거 참여하여 감리교인인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이화학당 학생이 목숨을 희생한 삼일운동의 선봉자로 드러나지 않았나. 개신교는 삼일운동을 통하여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경험하면서 국민의 가슴속에 파고든 민족 종교로 부상할 수가 있어서 그 후로 큰 부흥이 따라올 수가 있었으니 애국적인 청년들이 교회로 찾아 들게 되었던 것 같다. 개신교도인 남강 이승훈(南崗 李昇薰/ 1864-1930) 장로는 더 많은 기독교 대표들임에도 불구하고 통 크게 종교를 초월한 연합적 민족 운동에 천도교의 손병희를 대표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다수 결의로 해도 개신 교인이 대표로 나설 수 있었지만 천도교인을 앞세운 미거(美擧)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