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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Proxy War & Mercenaries / 대리 전쟁과 용병

Proxy War & Mercenaries/ 대리 전쟁과 용병

냉전 시대에 한국전쟁이 최초로 대리 전쟁(a proxy war))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리(代理) 전쟁이라 함은 남을 대신하는 국제간의 군사적인 싸움을 말하니, 공산주의의 이념으로 세계를 제패(制覇)하려는 소련(蘇聯)의 야욕이 팽배하여 미국과 대치(對峙)하고 있던 한반도에서 북한을 꼬드겨 남한을 치도록 대리 전쟁을 사주했던 때문이다. 이에 같은 이념을 가진 중국 공산당 정권의 모택동(毛澤東)과 비밀리에 협약을 하고서 일으킨 기습 전쟁이었다. 북한은 대거 소련의 무기(武器)를 몰래 지원 받아서 멀리 시베리아 철도를 거쳐 삼팔선에 날라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회를 틈타서 남침을 감행한 것이다. 모택동은 시치미를 떼고서 북한의 승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위 애치슨라인(Acheson Line)을 1950년 1월 12일에 미 국무 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 1893-1971)이 기자 협회 연설에서 확인하므로, 한반도와 타이완을 비껴서 일본과 필리핀을 포함하는 선을 긋고는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였으니 일본과 필리핀까지만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당시에 미국은 낮게 여겼다. 그리고 러시아의 괴뢰(傀儡) 국으로 새로 생긴 김일성의 북한이 미약하다고 판단했기에 전쟁 같은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6.25 남침에 재빨리 결단을 내리고 소련의 계략을 꺾기 위해 유엔을 통한 결속으로 전에 없던 유엔(UN) 군을 만들어 한반도에 참전하였다.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나라들이 함께 일어났고, 역전의 용사였던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여 인천상륙작전이라는 기발한 전략으로 남진한 북한의 기세를 잘라서 전세를 돌리고 북한군을 북으로 격퇴하여 도리어 압록강까지 우리 미약한 국군도 힘을 합쳐서 유엔군과 함께 북진을 했다. 다시 남북 통일이 거의 다 성취된 줄로 여길 정도로 성공을 했는데, 느닷없이 중공(中共)이 인민군(人民軍)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숫자를 내려 보내서 소위 인해 전술(人海戰術)이라는 끔찍한 발상을 동원해 우리 국군과 미군의 총알 받이로 파도처럼 밀려오면서 뒤덮는 바람에 연합군은 다시 후퇴를 해서 서울이 도로 중공군에 빼앗겨 1951년 1월에 소위 일사후퇴(一四後退)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마침내 는 다시 미군의 공습과 반격으로 그해 서울을 9월 28일에 탈환하였으니 우리 역사는 그것을 9.28수복(收復)이라고 한다. 3년을 끌면서 전쟁에 지친 양 편이 긴 휴전 협상을 한 끝에 1953년 7월에야 총성이 멈추고 다시 38선을 경계로 휴전이 성취된 후 지금에 이른 것이다.

남북한이 세계 대전의 종식으로 신생 국가로 힘도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은 국력이었지만 막대한 소련과 미국의 무기가 동원되어 이 작은 한반도를 불바다로 만든 그 비극을 어찌 우리가 말로 다할 수가 있겠는가. 냉철히 생각하면 진정으로 우리가 원하여 우리 민족의 복지 문제를 놓고 싸운 것이 아니라 냉전의 대치 속에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의 충돌이었으며, 결국은 소련의 공산당 야욕과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의 방어가 충돌한 대리 전쟁이었다. 지금 유럽의 우크라이나가 그런 형국이니 동서(東西)의 두 정치 체제를 대신하여 러시아와 서방의 대리 전쟁이 된 것이다. 러시아의 독재와 서방의 자유민주주의 사이에 일어난 갈등과 분쟁의 불꽃이 튀기고 있다. 이미 용병이 우크라이나에서 싸우고 있는데, 일전에 시리아의 대통령 아사드가 모스크바에 가서 러시아에 4만 시리아 용병을 제안했다. 병사 당 월 $300-600에 사망 수당을 요구해, 시리아 수익의 20배가 넘으니 내전에 찌든 경제라 용병이 가능한 것 같다. 러시아가 시리아, 체치니아 등의 용병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만회를 하겠는가? 한국에서 의 대리 전쟁이 자유 민주의 세계가 합쳐 소련과 중공을 막아냈고, 다시 우크라이나 전쟁도 나토와 자유 세계의 협력으로 용병과 러시아의 야욕도 막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