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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영주 소수서원 / 사학의 효시 소수서원에

榮州 紹修書院/ 사학의 효시 소수서원에

입하(立夏)의 본격적인 여름 절후로 접어든 어제 공휴일에 날씨도 너무 맑은 5월 소백산맥을 통과하여 풍기(豊基)에서 영주 한우로 점심을 5분의 황(黃)씨 종친과의 회식으로 환영을 받고 소수서원을 또 다시 탐방했다. 소백산의 정기(精氣)로 팔순 구순의 두 어른의 강건하심에 놀라웠다. 절 터의 당간 두 기둥만 그 유적으로 남겨 조선 시대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도 있었지만 조선 500년의 유학(儒學)의 선봉에 섰던 역사의 한 순간을 새삼 체감하였다. 신재(愼齋 周世鵬/ 1495-1554)와 퇴계(退溪)를 표출하는 공경 경(敬)자를 바위에 새김한 글자는 올 때마다 안내자들이 강조하지 않는가. 퇴계의 성학십도에도, 신재의 호(號)에도,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가는 경(敬)의 태도며 유학(儒學)의 실행을 그렇게 강조하였다. 어린이날이라 붓과 빨간 먹물을 특별히 준비해 두고서 암벽 맞은 편 경(敬) 자를 보면서 아이들에게 써보게 하면서 체험하도록 만든 모습이 돋보였다.

본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1542년 주세붕(周世鵬) 풍기 군수가 최초의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 때의 안향(安珦/ 1243-1306)의 사우(祠宇)로 세웠고 그 이듬해 향교 건물을 그 앞에 옮겨서 재실을 마련하고 선비들의 서원을 만든 것이었다. 주자의 백운동 학규(白雲洞 學規)로 강학을 처음 도입하면서 이름도 백운동서원이라 했다. 거기에 1550년 풍기 군수였던 이황(李滉/ 1503-1571)의 청원으로 최초의 사액서원인 명종(明宗) 일금이 소수서원이란 현판[賜額]을 내려서 생겨난 새 이름이다. 소수라 함은 무너져버린 교육을 다시 이어서 닦게 한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이다. 이로서 우리나라에 국가가 공인한 최초의 사립대학(私立大學)과 흡사한 사학(私學)이 된 셈이다. 2019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소수서원에서 수학 한 유생들이 4천 여명이나 되었으니 옛날 대단한 인재 교육이 아니었는가. 그때에 유생 중에는 임진왜란 때 진주 성에서 전사한 학봉(鶴峯 金誠一/ 1538-1593), 좌의정을 지낸 정탁(鄭琢/ 1526-1605)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일전에 바로 들은 바로, 친분이 있는 학봉의 계씨(季氏) 남악(南嶽 金復一/ 1541-1591)의 종손과 안동김씨의 그때 유생의 자손이 거의 5백 년이 지난 지금 그 세손들을 소수서원에서 찾아서 세교(世交) 행사를 한다고 들었다.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라 소수서원의 전통이 색다른 이벤트 뉴스와 함께 더욱 500년의 우리 역사에 실감을 더했다. 세계적으로 지금 이름난 하버드 대학도 3백 년도 안 되지만 소수서원의 사학은 5백년이니, 유수한 우리의 학구열이 일찍부터 얼마였나? 퇴계를 찾아 우리 넷이는 또 도산서원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