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인의글

師儒敎誨 / 가르치고 배우는 사회

師儒敎誨/ 가르치고 배우는 사회

제대로 가르쳐주는 스승이 없고 가르치고 배우는 기풍이 없는 사회는 문명과 문화가 바르게 발전할 수 없다. 조선 사회는, 적어도 당시 상류 사회는 유학(儒學)을 국가의 철학으로 삼았기에 끊임없이 배우고, 항상 가르치는 스승이 있었던 것이 우리의 사회적 특색이었다. 인격적으로는 덕(德)을 갖추고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배워야 했으니 조선 성리학에서 강조했던 대학(大學)의 내용이 바로 ‘덕을 밝히는 명덕(明德)인데,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시작하였으니 사물을 관찰하고 분별하여 이치를 배워서 아는 것이 기본이었다. 배우지 않고 지식이 없이는 인간 답게 교화(敎化)할 수가 없으므로 쉼 없이 학습을 강조하여왔다. 공자(孔子)가 논어(論語 學而篇)에 그것도 앞 부분에서 부터 “배우고 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 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 라고 했고, 그의 배우고 가르쳤던 일생을 논어(論語 述而)에 또 일렀다, “말없이 깨달아 알고, 배우기를 싫어하지 아니하며,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으니, 내게 무엇이 있겠는가(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공자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지만 실상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못해서 공자 같은 사람이 세상에 많지는 않다. 한 나라나 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는 그런 사람, 그렇게 가르치는 소위 스승이 절실한 것이다. 훌륭한 임금 중의 하나인 중종(中宗) 때 한 경축일에 신하들이 임금에게 나아가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에서 축하를 한 뒤에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대학(大學)이라는 책에 관하여 토론을 했는데, 거기 우의정이었던 성희안(成希顔/ 1461-1513)이 “요새는 도리를 가르치는 스승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서 내자부정(內資副正) 김안국(金安國/ 1478-1543) 같은 사람을 당시의 사유(師儒)라고 예를 들었다. 이에 교성군(交城君) 노공필(盧公弼)이 보탰다, “옛날에는 선생 되는 자가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지금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古者爲師者 敎誨不倦 今則無人).”며 받아쳤다. 이는 1510년 조선왕조 중종실록 12권에 나온다.

조선 시대의 유학(儒學)이 다 좋다고 만은 할 수 없지만 그 시대에 실행했던 학문에 대한 열망과 배움과 가르침을 통한 국가의 경영과 사회적 발전의 역사 방향은 우리가 배울 수 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학문을 널리 배우고 가르치는 교회(敎誨)가 있어야 한다. 개인주의 시대라서 자유로이 인터넷과 유투브와 같은 매체를 통하여서 온갖 분야에 다양한 방법으로 배우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실로 원칙적이고 사회 통합적으로 문명과 문화를 창도 하는 실력과 인격을 갖춘 스승은 여전히 많이 필요한 사실이 아닌가. 공자의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자세야 말로 긴 역사의 귀감으로서 사유(師儒)를 인식할 수 있다. 우리도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나라와 사회를 위한 지극히 작은 한 몫을 감당함이 아니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