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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거울 속의 난새/ 形影相弔

거울 속의 난새/ 形影相弔

 기댈 곳 없이 외로운 처지에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그림자만이 서로 쳐다보며 위로할 뿐이라는 ‘경경혈립 형영상조(煢煢孑立 形影相弔)’라고 읊었다. 홀홀단신(孑孑單身) 이런 적막한 고독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창작의 스토리는 수많은 소설을 낳고, 고대로부터 아름다운 그런 전설도 많지 않던가. 무더운 여름날일지라도 서늘한 곳을 택하여 깊은 감흥에 빠지는 납량(納凉)도 옛 사람들의 슬기였으니, ‘경란(鏡鸞)’이라는 슬픈 옛 얘기 하나 감상해본다. 배경은 역시 지금처럼 무더운 장강(長江) 이남에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게 동진(東晋) 이후에 남조 시대(南朝時代/ 420-589)였으니 소위 송(宋), 제(齊), 양(梁), 진(陳) 4나라의 때이니까. 남조 시대는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멸망시키고 다시 통일하기 까지 지금의 남경(南京)인 건강(建康)을 중심으로 수도를 삼은 정권들이었다. 그 남조(南朝) 시대에 송(宋)나라의 범태(范泰)가 지은 난조시서(鸞鳥詩序)에 나온 고사(故事)이다.

 지금의 위구르 신강성(新疆省)인 예전에는 소위 서역(西域)이라 불렀던 곳에는 지금의 무슬림 도시인 카슈가르(喀什噶尔)에 위치했던 한 나라가 있었으니 계빈국(罽賓國)이었다. 지금도 아득하고 생소한 감이 드는 저 먼 변방인데 1500년 전인 남조 시대 송(宋)나라에야 오죽이나 아득한 신비처럼 느꼈겠는가. 나는 여러 해 전 키르기스탄에서 인적이 드문 눈 뿌리는 높은 산을 버스를 타고 힘 들여 넘어서 거기 카슈가르에 갔고, 회교 문화 가득한 오아시스 도성을 거쳐 파키스탄 국경과 남서쪽으로 머나먼 험준한 길 없는 길로 버스를 타고 여러 날을 해발 4, 5천 미터의 산도 넘으면서 티베트의 라사(Lahsha)까지 가느라  무척 이나 고된 여행을 했었는데, 정말 다른 풍광과 신비하기까지 했던 사막 지대였다. 거기 전설에 그 계빈국의 왕이 준기산(峻祁山)에서 그물을 쳐서 난새 한 마리를 잡았다 네. 기산(祁山)이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6번이나 위군(魏軍) 접전했던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외진 곳, 역시 1200년 전의 신비한 감이 들 정도인데, 거기 더 높다는 준(峻)자를 붙여 준기산(峻祁山)이라 했으니 더욱 신화적인 느낌을 더하는 것 같다. 감숙성 보다 훨씬 더 먼 지금의 카스시(喀什市)인 계빈 국에서 이니 말이다.

 전설의 고귀한 새인 난조(鸞鳥) 또는 봉황(鳳凰)이라고 도 하는 난새를 애지중지(愛之重之)하여 금으로 새장을 만들고 진수성찬 같은 먹이를 주면서 울기를 고대 했는데, 3년이 지나도록 울지 않는 거 있지. 하, 그의 부인이 조언했다, “일찍이 듣건대 새는 자신의 무리를 보면 운다 하니 거울을 걸어 비추면 어떨까요?” 이에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본 난새가 돌연 애달피 크게 울더니 하늘로 한번 치솟아 날아올랐다가는 절명(絶命)하더라는 것이다. 이로서 경난(鏡鸞)이 남편을 사별한 부인의 슬픔을, 혹은 부부사별(夫婦死別)의 애통함을 은유 하게 되었다 네. 그러니 남편을 잃은 부인의 깊숙한 독수공방(獨守空房)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혈혈단신으로 형영상조(形影相弔)하는 고독과 비통을 상상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