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만명의 목숨을 바치며 미국에 맞서 승리한 전쟁의 지도자, 베트남 인민의 영웅 호치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호치민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에 침투해 북부 지방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프랑스군이 돌아왔을 때 프랑스와 평화협상을 벌이며 끈질기게 '민족독립'을 추구하였다.
호치민은 외교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결코 강한 외교의 밑받침이 되는 군사적인 압박, 대프랑스 무장항쟁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대단히 유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지도자였다.
호치민이 당시 베트남 역사에서 너무도 큰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호치민은 목민심서를 평생동안 즐겨 읽었고 부하들에게 목민심서(다산 정약용 저서)를 가르쳤다.
그리고 호치민의 시신 머리맡에는 목민심서가 놓여있다
그는 독립과 통일을 동시에 이룩한 국가의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다.
베트남은 공산화 되었지만 지금은 충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또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이기면서 베트남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 월남전 종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전쟁이며, 패권주의 초강대국 미국이 패배한 전쟁인, 월남전(Vietnam War ㅡ 1960~1975)에서 사이공이 함락되어 전체 전쟁이 끝났다. 이후 호치민(胡志明, Ho Chi Minh ㅡ 1890~1969)에 의해 남북 베트남(월남)이 통일되어 오늘에 이른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은 프랑스와 베트남간의 전쟁으로, 프랑스와 베트남간의 협정에 대해 양측의 극단주의자들이 불만스럽게 생각한 가운데 호치민은 일련의 회의(1946. 6~9)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고 프랑스 정부와 2차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하이퐁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1946. 11. 20~23)로 깨지고 말았다. 이때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군대 사이에 충돌이 있은 후 프랑스 순양함이 하이퐁에 포격을 가했다. 거의 6,000명에 가까운 베트남인이 죽는 바람에 우호적인 화해에 대한 기대도 무너졌다. 병든 몸에 환멸을 느낀 호치민으로서도 좀더 호전적으로 보복하자고 나서는 추종자들의 요구를 물리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12월 19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1953년말 국민 대중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 독립동맹에게 급속히 밀리고 있던 프랑스군이 라오스로 들어가는 민족주의자들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디엔비엔푸” 마을을 점령하자 전투가 일어났으며,
여기서 결정적으로 프랑스가 손을 들었다.
베트남 독립동맹의 장군 보구엔지아프가 4만 명의 병력으로 포위하고 대포를 앞세워 저지선을 뚫고 들어오자 프랑스군은 비로소 크게 놀랐다. 미국의 많은 원조에도 불구하고 1954년 5월 7일 기지는 함락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 은 1만 여 명이 항복하고 5,000여 명이 전사했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남전쟁이라고도 하는데,
미국은 1961년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결정으로 1963년 말까지 남베트남에 1만6천명의 군대를 최초로 파견하게 된다. 미국은 베트남전을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족해방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이자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간주했다.
1964년 8월 통킹만사건으로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미국은 남베트남군이 더 이상 남베트남을 위해 싸우지 않고 오히려 북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를 내세워 통일에 대한 염원이 더 팽배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여기에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1968년 11월에 있은 대선에서 연임에 실패하자 새로 당선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은 이듬해 닉슨독트린을 발표하며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철수할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1973년 1월에 있은 파리평화협정에서 미국은 정전협정에 합의하고, 미군 전쟁 포로를 석방해 줄 것을 북베트남에 요구했다.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인해 닉슨 체제의 정통성이 심각한 도전을 받았고, 이에 따라 사이공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초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대한 총 공세를 벌였고, 마침내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동 반 민(Dong Van Minh) 대통령이 항복했다.
베트남 전쟁에 미국은 4만7천365명의 군 병력을 파견했고, 그 중 1만1천명이 사망했다. 남베트남 군은 25만 명 이상 사망했고 NLF(북베트남) 군도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백만 가량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베트남 전체의 민간인도 2백만 이상이 사망하거나 상처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도 파월한 군병력중 4,600명이 전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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