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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37년만에 해금된 가야산 만물상과 법보사찰 해인사

1. 열두 명산 중의 하나인 伽倻山

 

靑華山人 李重煥은 그의 명저 澤里誌에서 금강산,설악산,오대산,태백산,소백산,속리산,덕유산,지리산,묘향산,칠보산(한반도에 있는 3곳의 칠보산 중 그가 말한 칠보산은 북한에 있는 칠보산임),청량산,가야산을 명산 중의 명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가야산은 백두대간이 덕유산에 이르기 전, 대덕산(大德山)에서 동쪽으로 갈라져간 산줄기가 수도산(修道山)을 솟아올린 다음 남은 기운을 다 토하면서 빚어 놓은 해발 1,430m의 산으로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수려하기 그지없고, 또 殺氣를 띠지 않아 地德이 두터운 산이다.

 

조선조 양대 외침전쟁인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때도 소백산, 오대산과 더불어 외적의 침략이 미치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해방 후 우리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동란 때 조차도 전화(戰禍)가 미치지 못한 유일한 곳(6.25 동란 때 소백산과 오대산은 심한 피해를 입었슴)이기에 가야산은 옛부터 '전쟁, 가뭄, 홍수로 인한 재해인 삼재(三災)가 들어오지 못하는 三災不入之地'로 불리어 왔으며, 또 가야산 동북쪽 만수동(萬壽洞)은 유명한 십승지(十勝地) 중의 하나다.가야산은 살집이 두텁고 골이 깊어 사시사철 많은 물을 토해내기에 물이 넉넉하여 산 아래 가야천 연변의 들판은 옛부터 가뭄을 타지 않고 농사가 잘되었으며, 땅도 아주 기름져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종자 한 말을 뿌리면 소출이 백이삼십 두나 되었다."고 적고 있다. 또 밭에는 목화 농사가 잘되어 조선조에는 이 지방을 일러 '의식(衣食)의 고장'이라 일컬었다. 이처럼 가야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이 산의 지덕으로 전쟁과 흉년을 겪지 않는 복을 누렸는데, 이 산의 정기는 이 산에 깃들인 사람들만 보듬고 거두는게 아니다. 옛 선지자 중에는 가야산이 만백성을 거둘 큰 힘을 품었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으니,

 

예언서 감결(鑑訣)은 우리나라 도읍터가 될만한 땅을 열거하면서, " 계룡산이 8백 년 도읍지가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도읍이 가야산으로 옮겨가 가야산 기슭이 1천 년 동안 수도(首都)가 되리라."라고 했다. 감결보다 후대에 쓰여졌고 훨씬 더 정확하고 상세하게 미래를 예언한 '격암유록'은 방방곡곡 명산에 어린 빼어난 정기가 지금 이 시대에 힘을 발휘하여 후천시대를 여는데 큰 몫을 한다고 예언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태백산,소백산,속리산,계룡산,지리산,덕유산,금강산,가야산, 한라산,백두산 등의 명산들이 품은 성스러운 기운이 후천시대를 위해 예비되었다는 것이다.

 

가야산을 흘러내리는 가야천 주변으로는 훤칠하게 잘생긴 산봉우리들이 줄지어 늘어섰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학과 봉황이 떼지어 노니는 형상 같다. 깃을 치며 훨훨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 막 날개를 펴고 하늘로 치솟는 모습, 깃을 접고 단정히 앉은 모습 등 각양각색으로, 어느 봉우리 하나 탁하거나 흉하지 않을뿐만이 아니라 골짜기엔 맑은 물이 쉼없이 흐른다. 12명산 가운데서도 가야산처럼 입구에서 부터 살기을 벗고 수려한 산세를 보여주는 산은 거의 없다. 오대산이 그러하지만 맑고 깨끗한 기운은 가야산이 더 낫다. 그래서 오대산이 임진란의 전화는 면햇으나 6.25 때는 치열한 전투를 치려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반해서 가야산은 그 참담했던 겨레상잔의 비극을 극적으로 비켰갔던 것이다.

 

가야산 초입의 홍류동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들어와 말년을 보낸 곳으로 '삼국사기'에는 그가 형 현준(賢俊) 스님, 정현(定玄) 스님과 더불어 가야산에 은둔하며 도를 닦았다고 하며,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는 儒佛仙 三敎에 조예가 깊었던 그가 崔承祐한테서 선도를 선수받았으며, 가야산에 숨어 살다가 어느날 숲 속에 신과 갓을 벗어두고 자취를 감췄다고 전한다. 후세의 선도인들은 그가 선인이 되어 아직도 살아 있으며, 가끔 가야산과 지리산에 나타난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떠돈다. '해동전도록'에는 고운선생과 상락군 權淸진인이 지리산에서 함께 지냈다고 했으며, 지리산 불일폭포 부근엔 그가 학을 타고 와서 노닐었다는 바위 환학대가 있다.

 

12살 때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6년 만인 18세 때 당의 賓貢科에 장원급제한 후 '토황소격문'으로 文名을 날리다가 28세 때 귀국한 후 관직에 올랐던 고운은 몰락해 가는 신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심혈을 기울여 진성여왕에게 정치개혁을 進言했지만, 기존세력들의 반발로 무산되고, 지배계층들은 갈수록 부패해졌고 나라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기에 "鷄林은 누렇게 시들어 가는 나뭇잎이고, 곡령(고려가 일어난 개성)은 푸른 소나무다."라는 말을 남기고 표표히 관직을 떠났다.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세속에 대한 관심을 훌훌 털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발길 닿는 대로 방방곡곡을 유람했다. 그의 '入山詩'를 보면 다시는 속세로 들어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엿볼 수 있다.

 

스님네여 청산이 좋다 말하지 마시오

산이 좋으니 어찌 산을 나가리오

뒷날 내 자취를 두고 보시오

한 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 안 돌아 오리다.

 

그의 이 시처럼, 우리나라 명산.명소 어디를 가 보아도 그와 얽힌 설화가 전하지 않는 곳이 드물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많이 찾은 곳은 지리산,가야산,마산의 월영대,부산 해운대, 경주 남산, 의성 빙산 등이다.

 

가야산 홍류동 무릉교 옆에는 그가 썼다는 시문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바위는 致遠臺, 題詩石이란 이름으로 불리는데, 시문의 내용은 이렇다.

 

바위에 부딪치며 미친듯 쏟아지는 물소리

첩첩한 산봉우리를 울리어

바로 앞의 사람 말소리도  알아듣기 어렵네

항상 시비소리가 귓전에 닿을까 늘 두려워

저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덮어버렸네

 

고운선생이 거닐며 노닐었다는 농산정과 '고운선생돈세지(孤雲先生돈世地)'를 지나면서 가야산의 산빛은 더욱 맑고 깨끗해진다. 특히 농산정 주위의 굵은 赤松이 뿜어내는 청량한 기운과 더불어 생동하는 산봉우리들이 꽃잎처럼 겹쳐있어 흉한 골짜기들이 눈에 띄지않고 험한 바위들은 무성한 나무들이 가려주기에 이같은 기운은 더욱더 짙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의 높은 산들은 골짜기 양쪽의 산줄기들이 날카롭게 치달려내려와 마치 칼끝끼리 서로 찌르는 듯한 형상을 한 곳이 많다. 만약 그 모습이 칼끝끼리 겨누어 치르는 모양같으면 스 흉흉한 살기로 인해서 많은 사람을 傷하게 하는 바, 다행히도 가야산은 그런 산줄기가 별로 없다. 참으로 드믄 일이다. 그래서 지극한 평화를 누리며 산다는 仙人들이 이곳에 오가는가 보다.

 

가야산 동성봉(1,257m)에서 칠불봉(1,433m), 상왕봉(1,430m), 두리봉(1,133.4m), 깃대봉, 단지봉, 남산제일봉(1,010m), 매화산까지 반원형으로 이어지는 가야산 주맥(主脈)의 모습은 산내 암자인 백련암터 한가운데에 있는 佛面石이라 불리우는 바위의 모습과 일치한다. 원만하고 온화한 형상이 흡사 부처님과 똑같은 이 바위는 하얀 연꽃 위에 단정히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인데, 가야산의 모든 기운이 이곳 한 곳으로 집중되고 있다. 이곳에 서면 앞에 걸리는 것 없이 확트여 가야산에서 매화산까지 반원형으로 휘어도는 가야산 주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이곳에서 이성철대종사 같은 분이 나타났으리라.

 

가야산 정상을 오르는 길은 통상 백운대매표소에서 용기골로 올라 칠불봉, 상왕봉을 거쳐 치인리 해인사로 내려가는 코스와 백운대에서 심원골을 거쳐 서성재, 칠불봉, 상왕봉, 치인리 해인사로 내려 가는 코스 및 백운대 - 만물상 - 칠불봉 - 상왕봉 - 해인사 코스가 있고, 또 해인사에서 토신골이나 극락골 골짜기를 따라서 상왕봉으로 올랐다가 다시 해인사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코스 등이 있는 바, 어느코스나 모두 왕복 5 ~ 6 시간소요되며 약 8.5km 전후의 거리다. 이중 만물상코스는 급경사 낭떠러지 때문에 추락의 위험이 상존하는 관계로 지난 37년 전부터 통제되었다가 금년 6월 10일을 기하여 해금된 지역으로 마치 설악산 천불동의 축소판을 보는듯 하게 수 많은 선인, 부처와 각종 동식물 등의 형상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게 선명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가야산의 정상은 특이하게도 해발 1,433m인 칠불봉이 아니라 그보다 3m 더 낮은 해발 1,430m인 상왕봉이다. 이는 아마도 그 옛 날 정확한 해발고도를 측량할 수 없는 시기에 눈대중으로 어림잡아서 정한 目測에 의한 결과라고 셍각된다. 소의 머리를 닮아서 우두봉(牛頭峰)이라고 불리우는 상왕봉(象王峰)에 서면 저 멀리 새털같이 몽게 뭉게 피어오르는 흰 구름을 뚫고 우뚝 솟은 지리산 천왕봉과 덕유산 향적봉을 필두로 두리봉,남산제일봉,의상봉,매화산, 비계산 등의 준봉들이 일망무제로 한 눈에 들어오고 합천과 성주일대의 평원들이 시원하게 조망되며, 발 아래로는 뭉게 구름들이 흘러간다. 사적 및 명승 5호인 국립공원 가야산은 경남 합천군과 경북 성주군의 경계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바, 예로부터 아름다운 용모와 착한 마음씨를 지닌 정견모주(正見母主: 이 이름이 참 재미 있다. 佛家에서 이야기하는 八正道 중의 하나인 正見과 뿌리라는 뜻의 어미母 및 眞我를 뜻하는 민족仙道의 주인主가 합쳐진 말로 이미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곳이 선인이나 부처의 땅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라는 여신(女神)이 머무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왔다. 이 정견모주가 하늘신 이질하와 만나 혼인하고 살았다는 상아덤이 서성재에 남아 있다. 상아덤은 6가야국의 주산으로서 용기골에서 정상에 오르는 城터에 우뚝솟아 삼리등(三里登)이라고도 하며, 사방 사백리가 일망무제로 보이는 가망사백리(可望四百里)의 성봉(聖峰)이다. 기암괴석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상아덤은 가야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물상(萬物像)능선과 이어져 있는데, 서장대 또는 서성대라고 부르고 있으나 상아덤이 본래의 이름이다. 정견모주가 산 아래 살고 있는 백성들의 살기좋은 터전을 닦아주기로 큰 뜻을 품고 정성을 다하여 빌자 여신의 정성을 가상히 여긴 하늘신 이질하(夷叱+匕訶)가 어느 봄날 오색 꽃구름 수례를 타고 이곳 상아(女+常娥)덤에 내려와 부부가 되어 두명의 옥동자를 낳았는데, 형은 뇌진주일(惱窒朱日)로 후일 대가야의 시조가 되었고, 동생은 뇌질청예(惱窒靑裔)로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되었다고 한다. 형의 얼굴은 아버지 천신을 닮아 해와같이 둥그스름하고 불그레하였으며, 아우의 얼굴은 어머니 여신을 닮아 가름하고 흰편이었다. 가야산이 있는 합천지방이 본래 대가야땅이었으니 이 설화는 대가야의 건국신화였을 것이고 대가야의 시조가 형이라고 했으니 금관가야가 쇠약해지면서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가 된 다음에 형성된 것으로 추청된다. 왕이 된 정견모주의 두 아들의 후예 중 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과 혼인하여 열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거등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가야국의 이대왕(二代王)이 되었고, 둘째, 셋째아들은 어머니 허씨의 성을 따라서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 세명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 일곱명이 인도에서 허황옥을 따라온 허황옥의 동생인 외삼촌 장유화상을 스승으로 이곳 칠불봉(七佛峰) 아래서 수도를 하여 생불(生佛)이 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칠불봉에서 상왕봉을 바라보면 영락없는 소머리 즉 두 개의 거대한 뿔을 가진 소머리 처럼 보인다. 그래서 아마도 우두봉이라고 불리웠을 것인데, 또 이를 봉천대(奉天臺)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코끼리가 코를 길게 늘어트리고 앉아있는 모습이라서 상왕봉(象王峰)이라고 불리웠을 것이다. 이같이 가야산 정상에는 기기묘묘한 바위 봉우리가 많아서 보는 각도에 따라서 각기 달리 보이는 것이 이 산의 특징이기도 하다. 상왕봉 아래는 옛 날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奉天臺가 있으며, 상왕봉 좌측 봉우리 아래로는 마치 천계(天界)의 천선(天仙)이 하강하는 듯한 모습의 바위가 있는데, 그 일직선 상에 바로 해인사 장경각이 자리잡고 있기에 이곳이 삼재불입지처가 된 것이다.

 

택리지에 '가야산은 끝이 뽀족한 바위들이 나란히 늘어서서 불꽃이 공중에 솟는 듯하고 대단히 높으면서도 수려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하여 과연 해동명산의 하나로 꼽을만 하다.

 

2. 행주형(行舟形)의 명당(明堂)에 자리잡고 있는 해인성지(海印聖地) 해인사(海印寺)

 

佛 法,僧 삼보(三寶)사찰 중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가 있는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는 옛부터 '전쟁, 가뭄, 홍수로 인한 재해인 삼재(三災)가 들어오지 못하는 三災不入之地'로 불리어 왔던 福地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법보사찰 해인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때 의상대사의 법손(法孫)인 순응()과 이정()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가야산)에 초당()을 지은 데서 비롯된 천년고찰이다. 순응은 의상대사의 법제자(法弟子)인 신림(神琳)을 찾아가 공부한 다음 중국에 가서 교학(敎學)과 선(禪)을 깊이 탐구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불법을 널리 펼만한 터전을 찾아 가야산으로 들어가 정진했다. 그들이 선정()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논과 밭 2천5백 결9結)을 시주한 후 직접 가야산에 와서 원당()을 짓고 정사()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이 동문수학한 사형제 관혜(觀惠)가 지원하였던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아 해동() 제일의 도량()이 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 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후 세조가 장경각()을 확장·개수하였으며, 그의 유지를 받든 왕대비들의 원력()으로 금당벽우()를 이룩하게 되었다. 제9대 성종() 때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불교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해인사터는 바다로 나가는 배의 형국인 행주형(行舟形)의 명당이다. 주산(主山)인 뒷산이 매우 웅장하고 앞산인 안산(案山)은 수려하고 예쁠뿐만이 아니라 나지막하여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행주형의 명당은 보통 해상(海商)이나 수군9水軍)의 장수들을 많이 배출한다.그리고 대부분 안산이 돛대나 노처럼 생겼다. 한데 해인사터는 여느 행주형과는 많이 다르다. 안산이 봉황처럼 생겼고 돛대가 명당 안에 있다. 명당 안에 돛대를 갖추었으니 그 기세가 말할 수없이 뛰어나고, 또 상서롭기 그지없는 봉황을 배에 실었으니 성서러운 기운이 크게 감돈다. 범속(凡俗)을 초월한 대도인(大道人)이 나올 곳이다.

 

해인(海印)이란 이름은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따온 말이다. 삼매는 인도어로 '사마디'인데 '온갖 번뇌를 여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를 뜻한다. 이 경지는 곧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길이며, 사마디에 들면 삼라만상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진리의 세계에서 삼라만상의 참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또 '해인'이라 이른다. 진리의 세계는 바로 부처의 세계이며 하늘의 세계이다. 그러니까 해인사터는 진리의 바다, 즉 하늘세계로 나아가는 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악(惡)이 지배하는 선천시대(先天時代)가 끝나고 선(善)이 지배하는 후천시대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준 예언서 <격암유록>은, 선천시대 말엽에 출현하여 고통받는 중생들을 후천시대(後天時代)로 인도할 진인(眞人)이 해인을 들고 온다고 했다. 그래서 예언서를 믿는 사람들은 해인이 무엇을 말하는지 매우 궁금히 여겼다. 어떤 이들은 해인사에 이상한 도장(印)이 있는데, 그것이 해인이며, 누가 훔쳐 달아났다는 말을 퍼트리기도 했는데, 이를 받아서 이 해인을 자기가 갖고 있다며 구세주를 자처하는 사교(邪敎)의 교주까지 나타나는 웃지못할 진풍경도 있었지만, 모두 허무맹랑한 얘기들이다.격암유록에서 말하는 해인은 어떤 특이한 물건이 아니라 중생들을 진리의 세계, 하늘세계로 인도하는 기운을 말한다. 이 기운은 하늘기운이며, 산천이 품은 정기 중에서 가장 빼어나게 아름답고 성스러운 기운이다. 하늘기운은 세상 사람들을 하늘사람, 즉 모두 성자로 만든다. 구세성인은 이 하늘기운을 써서 세상사람들을 성자들의 세계, 하늘세계로 데러 간다.

 

가야산과 해인사는 전쟁의 화를 입은적이 없었다. 또 최고운선생, 이성철 대종사같이 뛰어난 선도인과 많은 고승들을 배출했다. 이 모두 가야산에 깃들인 하늘기운 즉 해인기운의 덕이리라. 따라서 후천개벽 때가 이르면 더 많은 사람들이 해인기운을 받아서 참모습을 찾고 하늘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해인사는 그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화엄사상을 꽃피운 화엄도량으로 부석사, 화엄사, 갑사, 범어사 등과 더불어 화엄십찰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 이정스님은 화엄사상으로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킨 의상대사의 법을 받은 이들이었고, 희랑(希郞), 대각국사 의천(義天), 해봉유기(海峯有璣), 설파상언(雪坡尙彦), 벽암각성(碧巖覺性) 등 많은 화엄학의 대가들이 해인사에 주석하면서 화엄정신을 꽃피웠다. 지금도 이곳에는 많은 수행자들이 운집(雲集)하여 용맹정진하고 있으며, 선원(禪院), 강원(講院), 염불원(念佛院)을 두루 갖춘 대도량(大道場)으로 해인총림(海印叢林)이라 불린다. 선원에서는 수좌(首座: 참선수행하는 스님) 50여 인이 참선수행 중이고, 강원에서는 학인(學人: 경전을 공부하는 스님) 100여 인이 불법을 탐구하는 대가람이다.

 

해인사의 풍수(風水)

 

해인사 주산은 해인사의 정동방(正東方)인 묘방(卯方)에 솟았는데 그 기세가 안산(案山: 앞산)을 압도할 만큼 웅장하다. 풍수학에선 묘방의 봉우리가 높고 웅장하면 영웅 호협을 배출한다고 보는데, 이같은 연유로 해인사의 스님들은 기질이 헌걸차고 강건하기로 유명하다. 이같은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일제 때 독립운동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친일행각으로 유명한 승려 회광(晦光)이 해인사 주지로 부임한 적이 있었는데, '침략자에게 빌붙어 일신의 영화를 얻으려는 탁승(濁僧)을 주지로 받아들일 수없다.'고 거세게 반대하여 결국 회광이 주지직을 포기하고 떠나도록 했다.

 

해인사 담장 뒤에는 수마노탑이라 불리우는 탑 하나가 서 있다. 이 탑이 서 있는 자리에는 원래 행주형인 해인사의 돛대 역할을 하던 돛대바위라는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 해인사 스님들은 반일감정이 아주 강했고, 그 중에는 독립운동에 적그 참여한 스님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를 미워한 일인들이 해인사의 지기를 망가뜨리려고 돛대바위를 깨뜨려 버렸다. 해인사터는 그 바람에 돛대없는 배 형국이 되었다.

 

바다에 나간 배가 돛을 달 수없다면 힘을 못 쓰고 표류하는게 당연하듯이 해인사도 한동안 돛없는 배처럼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살림을 도맡은 주지는 부임한지 1년도 안 지나 갈리기 일쑤였고, 해인사를 찾아온 수행승들은 안정을 못찾고 방황했다는 것이다. 이를 염려한 스님들이 해방 후에 돛대바위가 있던 자리에 수마노탑을 세웠다. 그 후 이 수마노탑이 해인사터의 돛대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 후 해인사는 차츰 대수도장(大修道場)의 장엄한 풍모를 되찾기 시작했으며, 의상대사 이후 활짝 꽃피었던 화엄정신이 지금와서 열매를 맺으려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처럼, 임진왜란 7년, 일제침략 36년을 겪으면서 배달강산은 우리 겨레처럼 혹심한 고초를 겪었다. 왜군들과 명나라 군사들이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시기하여 산봉우리에 쇠말뚝을 박고 산줄기를 끊어버리는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우리 산천에 어린 빼어난 정기가 심하게 파괴되었다. 아직도 방방곡곡에 많은 산들이 머리에 쇠가 박히고 팔다리가 잘린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 장경각(藏經閣)

 

해인사가 법보사찰로 불리게 된 것은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 때문이다. 법보란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을 뜻한다. 불경의 판본 중에 해인사에 보관된 대장경판만큼 방대한 판본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그러니 법보사찰이란 말을 들을만하다. 

 

고려 고종 때 불력(佛力)을 빌려서 외적(몽고)의 침략을 막고자 무려 16년의 대역사(大役事) 끝에 1,511종 6,805권에 달하는 문헌들을 8만개가 넘는 목판에 새긴 전 세계에 전무후무하고 유일무이한 이 대장경은 남해바다 여러 섬들에 자라는 자작나무를 베어 3년 동안 바닷물에 침수시키고 또 소금물에 삶아서 그늘에 말린 후 대패질을 해서 경문을 붓으로 쓴 다음 끌로 새겼다. 그리고 판 전체에 옷칠을 하여 벌레들이 범접할 수 없게 만들었다.

 

팔만대장경이 서울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해인사까지 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이 대장경을 만들기 전에 속장경을 주조한 대각국사 의천과 인연이 깊은 도량이기 때문이라는 설과 가야산 지덕(地德)이 두텁고 교통이 불편하여 외적의 침노로 부터 안전하기 때문이라 설 및 유학을 숭상했던 조선조의 지배계층이 불법의 상징인 팔만대장경을 유배보내듯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으로 옮겻다는 설 등 여러설이 존재한다.이유야 어찌돼었던 해인사는 대장경이 옮겨오면서 부터 새로운 역사를 맞았는데, 법보사찰이라 불리우며 불법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도량으로 변모하였고, 또 해인사뿐만이 아니라 해인사를 품고 있는 가야산 전체가 성지로 숭배받으며 청정9淸淨)한 수도장이 되었다.

 

대장경판을 보관한 장경각은 코끼리가 양등허리에 경판을 가득실고 앉아 있는듯 한 가야산의 주봉인 상왕봉(象王峰, 1,430m)과 선인하강형9仙人下降形)의 그 좌측봉우리가 일직선으로 내려앉은 자리에 위치하여 해인사 부속건물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그 아래에 자리잡았으니 부처님 머리 위에 불법이 얹혀 있는 형상이다. 이 자리는 해인사에서도 가장 빼어난 명당으로 앞산의 높이도 적당하고 청룡과 백호 또한 아늑하게 잘 감씨주고 있다. 장경각 아래로 내려가면 청룡. 백호가 약간 허약하게 보이고 앞산인 안산도 좀 높아진다.

 

해인사는 창건 이후 일곱 차례(조선 숙종 때 2번, 영조 때 1번, 순조 17년 1번 등)의 대화재를 만나 건물 대부분이 소실된 후 중창되었지만, 유일하게 장경각만은 한 번도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는 장경각 터의 지기(地氣)가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해인사터 중에서도 가장 노른자위인 것이다.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은 7백여 년 전에 만들어졌고, 또 6백여 년 전에 해인사로 옮겨왔지만, 그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판본들은 조금도 상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이처럼 탈없이 잘 보존된 것은 옛 사람들의 슬기와 장경각터의 빼어난 지기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장경각을 지을 때는 바닥을 깊이 파고 숯, 찰흙, 횟가루를 다져 넣었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비가 많이 와서 습해지면 바닥에서 습기를 빨아들이고, 가뭄이 들어 건조할 때는 바닥에 스며있던 습기가 올라와 습도를 알맞게 조절해 주었다. 문 또한 통풍이 잘 되도록 교묘하게 만들었으며, 건물의 배치 또한 공기의 대류순환이 원활하도록 'ㄷ'자로 배치하여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고려되어 있다.

여기에 벌레들로 인한 피해를 보기 쉬운 목판본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바닷물에 침전시킨 후 소금물로 삶았으니 우리 옛 선조들의 뛰어난 슬기에 찬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 터가 가지고 있는 이같은 성스럽고도 웅혼한 지기지덕(地氣之德)은 새,쥐같은 날짐승과 지상의 미물조차도 이곳을 피해가게 만들었으니, 신이하게도 장경각 위로는 새조차 날아 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성철대종사가 말년을 보낸 백련암

 

현존하는 가야산의 도량터 가운데 가장 빼어난 기운이 서려 잇다는 평을 듣고 잇는 곳이 바로 가야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잇는 암자인 백련암터다. 조계종 종정직을 맡았던 성철스님이 오랫동안 머물다가 1993년 11월에 입적햇던 곳이기도 하다.가야산 상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산줄기 하나가 해인사의 주산을 빚어올리고 다시 동남쪽으로 뻗는다. 그 산줄기는 몇 번을 꿈틀 꿈틀 용트림을 한 끝에 남은 힘을 다모아 수려한 바위봉우리들을 솟아올리고, 그 밑에 고즈넉한 수도터 하나를 마련해 놓았으니 바로 백련암터다. 백련암 뒤에는 용각대(龍角臺), 신선대(神仙臺), 절상대(絶相臺), 환적대(幻寂臺) 등의 바위봉우리가 우뚝 서서 명당의 기상을 한층 북돋워준다. 이들 봉우리들의 이름만 들어도 이곳이 범상치 않는 곳임을 알려주는데, 앞은 걸리는 것없이 확트여 가야산에서 매화산까지 반원형으로 휘어도는 가야산 주맥(主脈)이 한 눈에 들어오며, 또 이 주맥의 형상을 한 바위인 불면석(佛面石)이 백련암터 한 가운데 있어 이곳에 가야산의 모든 기(氣)가 응취(凝聚)되어 있슴을 알려준다. 원만하고 온화한 형상이 흡사 부처같은 이 불면석은 마치 하얀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부처모습같다.

 

백련암의 주산은 학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학이 막 날개를 접으며 둥지에 앉는 모습이다. 따라서 백련암터는 학의 둥지인 학소형(鶴巢形)이다. 학 형국의 산은 성품이 고매한 인물들을 배출하니, 도(道)가 높은 이들이 연이어 머물 땅이다. 그래서 백련암은 가야산 최고의 명당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많은 고승들이 다녀갔다.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스님의 명성만 듣고도 감히 가야산을 침노하지 못했으며, 왜군들이 왔다가 엿보기만 하고 돌아 갔다해서 해서 붙여진 '왜규치(倭窺峙)라는 고개이름까지 생기게 했었던 고승 소암(昭庵)스님을 비롯하여 가야산 산신에게 부탁하여 가야산에 살고 있던 호랑이를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나게 만들었던 환적(幻寂)스님, 그리고 풍계(楓溪)스님과 성철스님이 모두 이곳 출신들이다.

 

백련암으로 오르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완편으로 갈라져 가면 후백제 견훤에게 쫓기어 위기에 빠진 왕건을 구해주고 후삼국 통일대업을 완성시킨 희랑(希郞)대사가 머물던 해복형(蟹伏形)의 명당으로 말법시대에 신이(神異)한 능력으로 많은 중생들을 건진다는 나반존자를 모신 희랑대(希郞臺: 하나의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나반기도 도량으로 유명)와 지족암이 있고, 또 해인사 우측 개울가에는사명대사으 열반처인 홍제암이 있다.

 

 

 

해인사의 현재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창건 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殿) 앞뜰의 3층석탑과 석등 정도가 있을 뿐이다. 특히 국보 제32호인 대장경판과 제52호인 대장경판고() 및 석조() 여래입상(보물 264)은 유명하다. 그 밖에 주요 문화재로 보물 제518호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128호인 반야사 원경왕사비()도 있다.

사찰 통도사(사찰 송광사()와 더불어 삼보()사찰 가운데 하나인 법보()사찰로 유명하다. 현재는 불교학원인 해인총림()이 있어 많은 학인()들로 붐빈다. 말사()는 150여개에 달하고 부속 암자로 백련암()·홍제암()·약수암()·원당암 등이 있다.

 

 

일자: 2010년 7월 30일 ~ 31일

7월 30일 23시 30분 신사동 출발

7월 31일 03시 35분 백운동 매표소 도착

7월 31일 토요일

04시 30분 여명을 뚫고 등산 시작

05시 35분 만물상 일출

07시 28분 상아덤 도착

08시 10분 칠붕봉 도착

08시 30분 상왕봉 도착

10시 18분 해인사 용탑선원 도착

12시 00분 주차장 도착

12시 30분 치인리 주차장 출발

16시 35분 신사동 도착

 

총 산행 거리 : 약 8.4km

총 산행시간 : 약 6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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