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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민족의 애환이 서려있는 活人之山 小白山(1439.5m)과 三災不入의 十勝之地 豊基

1. 한민족(韓民族)의 애환(哀歡)이 서려 있는 활인지산(活人之山) 소백산(小白山:1,439.5m)

 

지금으로 부터 약 400여 년 전, 한반도의 분단과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동란을 생생하게 예언한 민족의 예언서 '격암유록(格庵遺錄)'을 저술한 조선 조 중엽의 기인(奇人) 남사고(南師古) 선생이 조선팔도의 천하절승과 명당을 두루 섭렵하면서 주유(周遊)하던  중 풍기땅에 이르렀다. 그는 풍기에서 북쪽 하늘에 우뚝 솟아오른 소백산(小白山)을 보고는 타고 있던 말에서 뛰어내려 산을 향해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리고 "저 산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산(活人之山)이다."라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 남사고는 "우리나라 명산 중에서 소백산의 기운이 가장 온화하고 아름답다."고 평하면서 또 소백산 일대를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 水災, 火災, 질병 등 三災가 침범하지 못하는 땅)라 했다.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술(醫術), 복술(卜術), 풍수(風水), 사주추명(四柱推命名), 역학(易學) 등 동양오학(東洋五學)에 정통한 남사고가 아닌, 이같은 동양오학을 전혀 모르는 시중의 장삼이사(張三李四)일지라도 지금의 풍기관광호텔자리에 서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은 아름다운 소백산의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남사고가 무심결에 내뱉은 "저 산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산(小白山是活人之山)이다."라는 찬탄사를 읊조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남사고가 풍기땅에서 소백산을 보고 넙죽 엎드려 절했다는 자리가 바로 지금의 풍기관광호텔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白頭山)에서 길을 떠난 백두대간은 철령에서부터 동해를 옆에 끼고 계속 남하하면서 한반도의 척추인 태백준령들을 기봉(起峰)시킨 후 두타산(頭陀山) 어름에서 다시 방향을 틀어 서남쪽으로 향한다. 동해와 헤어진 백두대간이 두타산에서 백여 리쯤 떨어진 곳에 우뚝 솟아올라 이룬 산이 바로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옛부터 하늘에 천제(天祭)를 지냈던 태백산(太白山: 1,567m)이다. 백두대간은 이 태백산에서 두 갈래로 나뉜다. 한 갈래는 남쪽으로 뻗어 통고산, 일월산, 주왕산, 가지산, 영취산을 거쳐 부산의 금정산에 이르는 낙동정맥이 되고, 다른 한 갈래는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등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백두대간의 주맥(主脈)이 된다.  소백산(1,439.5m)은 이같은 백두대간의 주맥이 서쪽으로 뻗어나갈려고 하는 강한 기운(氣運)이 발현되어 솟아올린 산이다. 일직선으로 달리던 산이 방향을 전환할 때는 매우 강한 응축된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강한 응축된 에너지는 고스란히 산기운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같은 연유로 소백산에는 강한 응축된 에너지가 흐른다. 그래서 비록 태백산보다 1백여 미터쯤 낮은 산이기는 하지만, 산세는 훨씬 장엄하다. 신선봉(神仙峰)에서 도솔봉까지 주능선의 길이가 50여 리에 이르며 골짜기들도 매우 깊고 그윽할 뿐만 아니라 30리가 넘는 계곡들도 즐비하기에 골이 깊어 물이 많고 맑으며 수려(秀麗)한 맛도 태백산보다 훨씬 낫다. 또한 급작스럽게 90도로 방향전환을 하다보니 자연히 북서쪽은 경사가 완만하게 되어 이곳으로는 국망천이 흐르고, 동남쪽은 경사가 심하게 되면서 낙동강 상류로 들어가는 죽계천이 시작된다. 지질은 화강편마암이 중심을 이루며 주변으로는 중생대의 화강암류가 분포하고, 식물은 한반도 온대중부의 대표적인 식생을 갖는 지역으로 낙엽활엽수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철쭉 등 관다발식물 1,000여 종, 동물은 멧돼지 등 1,700여 종이 분포한다. 여기에 주봉인 비로봉은 수많은 야생화와 함께 아주 희귀식물인 에델바이스(외솜다리: edelwise)가 자생하고 이곳에서부터 국망봉 일대에는 주목(천연기념물 244)의 최대 군락지가 펼쳐진다.

 소백산은 태백산처럼 중턱 이상에는 바위가 거의 없는 흙산이다. 바위들은 산 아래 골짜기에 모여 있어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 높은 곳에 험한 바위가 없으니 산봉우리들은 생김새가 부드럽고 살기(殺氣)를 벗었다. 그래서 흙살이 좋다보니 정상 가까이에서도 나무들이 잘 자란다. 산중턱까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빽빽하여 사시사철 하늘을 향해 청청(靑淸)한 가지를 벌리고 서 있다. 비로봉(毘盧峰) 옆 주능선엔 주목(朱木)나무 군락지대가 있고, 연화봉(蓮花峰) 능선길에는 철쭉나무가 무성하다. 또 소백산은 예부터 산삼(山蔘)을 비롯하여 온갖 종류의 질 좋은 약초가 많이 나는 것으로도 유명했으며, 이들 소백산 자생약초들을 최상품으로 쳤다고 한다. 이같이 소백산 약초들이 약효가 좋은 것은 두말할나위도 없이 소백산의 토질(土質)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소백산의 흙은 다섯 가지 색깔이 도는 오색토(五色土)이다. 흰색(白色), 붉은색(赤色), 푸른색(靑色), 황색(黃色), 검은색(黑色)의 흙이 섞여 있는데 흰빛을 많이 띠어 아주 곱게 보인다. 풍수학(風水學)에서는 이 오색토를 생기(生氣)를 많이 품고 있다하여 흙 중에서 가장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분재를 할 때는 오색토를 많이 쓰는 것이다. 곱고 깨끗한 흙빛과 청청한 소나무가 어우러져 만든 풍치 또한 일품으로 멀리서 바라 본 소백산 연봉(連峰)들은 마치 물결이 넘실거리듯 출렁이며 뻗어간다. 또 부드러운 산봉우리들이 겹겹으로 솟아올라 구름송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소백산 연봉들은 그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비로봉(1,439.5m)·국망봉(1,420.8m)· 연화봉(1394.4m), 제2연화봉(1,357.3m)·도솔봉(1,314m)·신선봉(1,389m)·형제봉(1,177m)·묘적봉(1,148m), 원적봉 등 높이 1,100m이상의 수 많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으니 불도(佛道)와 선도(仙道)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물씬 배어있기 때문이다.

비로(毘盧)는 최고의 부처님으로 불성의 근원인 비로자나불을 줄인 말이며, 연화(蓮花)는 부처가 앉아 있는 연꽃좌대(蓮花坐臺) 즉 부처가 앉아 계신 연꽃이고, 도솔은 도솔천으로 뭇 보살, 부처들이 머무는 세계로 석가모니 이후에 오실 부처인 미륵부처가 현재 머물고 있는 곳이며, 원적(圓寂)은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삼라만상과 합일이 되는 것을 뜻하므로 소백산 연봉들의 이름을 풀이하면, '삼라만상이 무한한 평화를 나누는 도솔천 하늘세계에 앉아 계신 최고의 부처님'이 된다. 이같은 연유로 옛날 소백산에는 불도와 선도를 닦는 많은 수행자들이 함께 찾아들었고, 통일신라 화엄십찰(華嚴十刹) 중의 수사찰(首寺刹)인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했던 의상대사는 소백산과 태백산을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쳤고 그 후 소백산은 불교의 중요한 수도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선도의 한 도맥(道脈)이 소백산을 중심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대저, 우리나라 선도는 크게 우도방과 좌도방으로 나뉘는데, 이 둘은 수련방법만 다를뿐 지향하는 세계는 같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도맥을 이어왔다는 우도방(右道幇)은 고요한 단전호흡을 통해 우주의 참기운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수련법을 중시했고, 반면에 소백산을 중심으로 도맥을 이어왔다는 좌도방(左道幇)은 특정한 주문을 자꾸 외어서 정신을 집중시켜 우주의 진기(眞氣)와 합일에 이르고자 하는 수련법으로 양자 모두 우주의 진기와 합일을 이루는 것이 최종의 목표였다. 이같이 주문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련법과 고요한 호흡과 명상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수련법은 인도의 요가에도 있다. 요가에서는 고요히 명상에 잠기는 것을 '사마디(三昧)'라고 부르고, 깨달음을 위해 외는 주문을 '만트라'라 한다. 이들 모두 삼라만상과 합일된 세계, 즉 완성된 삶에 이르는 방편들인 것이다. 소백산 신선봉 자락의 협착한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일 사찰로는 국내최대의 신도수를 자랑하는 구인사(救仁寺)를 개창하고 천태종을 연 상월조사(上月祖師)도 이같이 소백산을 중심으로 전해오는 좌도방 선맥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구인사에선 수련할 때 주문을 많이 외기 때문이다.

 

  비록 수 많은 수행자들이 참 삶의 길을 찾아 드나들었고, 예언자 남사고가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고 절까지 올린 산이기는 하지만, 소백산은 우리 겨레의 한(恨)이 서리서리 감도는 비극의 산이기도 하다. 삼국시대 때는 신라·백제·고구려 3국의 경계에 속해 있었던 관계로 이 지역 일대에서는 전투가 자주 벌어졌기에 현재까지도 그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 바, 대표적인 유적이 고구려 장수 온달이 산라군을 막기 위해 소백산 북쪽 기슭에다 성을 쌓았다는 유명한 온달산성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로 널리 알려진 온달장군은 소백산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기에 그의 슬픈 운명처럼 고구려도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망하고 말았던 슬픈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6.25 민족상잔 때도 이곳에선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숱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던 겨레의 슬픈 한이 서리서리 묻어 있기도 하다.

 소백산에는 이같은 온달산성 외에도 죽계천 쪽으로는 석륜암(石崙庵), 석륜광산(石崙鑛山)·초암사(草庵寺)가 있고 이곳의 북동쪽으로는 석천폭포(石川瀑布)·성혈사(聖穴寺)가 있다. 남서쪽으로는 국망봉에 이어 제2연화봉이 있는데, 이 봉우리 동남쪽 기슭에는 643년(선덕여왕 12)에 창건된 희방사(喜方寺)와 내륙지방에서 가장 큰 폭포인 희방폭포(높이 28m)가 있다.

 골짜기마다 수행자들의 고결한 영혼이 깃들여 있는 이 성스러운 산에서 왜 이같이 꽃다운 젊은이들이 참혹하게 죽어 갔을까? 그것도 한피붙이, 한겨레끼리 서로 총칼을 겨누면서 상잔(相殘)을 이루었을까?

 풍수학에선 청룡과 백호 양쪽 산줄기가 칼끝처럼 뾰족하게 뻗어나와 서로 겨누는 형상을 하면 형제간에 처절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고 보는데, 바로 소백산 산줄기들이 그런 모습이다. 큰 줄기에서 갈라진 작은 줄기들이 칼끝처럼 날카롭게 뻗어 양쪽에서 서로 찌르려고 덤벼드는 형상이다. 이는 소백산뿐만이 아니다. 설악산, 지리산, 덕유산, 태백산, 오대산..... 등등 우리나라 큰 산들은 대부분 그런 산줄기를 품고 있고, 거기에 살기(殺氣)가 어려 있기에, 그 살기가 뿜어나와 겨레의 젊은이들이 한을 품고 스러져간 것이리라. 하지만, 같은 산이라도 수행자들이 머물던 자리는 다르다. 거기에선 험한 산줄기들이 보이지 않고, 맑고 평화로운 기운들이 가득 넘쳐난다. 참담한 고통과 지고한 평화, 이것이 우리나라 산들이 지닌 야누스의 두 얼굴같은 두 모습인데, 바로 소백산이 대표적이다. 예언가 남사고는 그의 예언서 '격암유록'에서 "소백산에 슬픈 넋들이 떠돌게 되리라, 그 다음에 만물중생이 무한한 평화를 누리는 새 시대가 도래하리라"고 적시하여 우리민족 최대의 민족상잔인 6.25의 비극을 4백여 년 전에 이미 예언하고 있다. 

 

 6월의 소백산엔 철쭉꽃이 만발한다. 국립천문대가 있는 제2연화봉(1357.3m)에서 시작되는 이 철쭉꽃 군락은 제1연화봉(1394.4m)을 거치고 비로봉(1439.5m)을 지나 국망봉(1420.8m)까지 이어지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 희고 붉은 소백산 철쭉의 물결은  거대한 꽃바다(花海)를 이루면서 웅장한 백두대간 주릉과 절묘한 하모니를 연주한다. 보는 이들의 눈을 휘둥그러지게 만드는 멋진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아름다운 골짜기와 완만한 산등성이, 울창한 숲 등이 뛰어난 경치를 이루어 등산객들이 많은데, 주요 등산로로는 희방사역에서부터 희방폭포와 제2연화봉을 거쳐 오르는 길과 북쪽의 국망천, 남쪽의 죽계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다. 죽령과 제2연화봉 산기슭에는 국내 최대의 우주관측소인 국립천문대가 자리잡고 있는 소백산은 일대에 수려하고 웅장한 산과 주변의 명승지가 많아 1987년 12월 소백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공원면적 320.5㎢로서 경상북도 영주시·봉화군, 충청북도 단양군에 걸쳐 있는 백두대간의 중추에 해당하는 산이다.

 

2. 삼재불입(三災不入)의 십승지지(十勝之地) 풍기(豊基) 금계동(金鷄洞)

 

소백산 발치 아래 마치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의 천하 명당인 땅(金鷄抱卵形明堂)'이 있으니 바로 풍기 금계동(金鷄洞)으로 밖(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이 땅은 '감결(鑑訣)'의 저자인 정감(鄭鑑)과 이심(李心)이 난세에 환란을 피하여 살 수 있는 십승지 중에서도 첫번째로 꼽은 복지이자 최고의 복지(福地)로 꼽은 땅이다. 그는 전쟁뿐 아니라 천재지변도 이 땅을 비켜간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 중종 때의 이름난 예언가인 남사고도 이곳에 와서 소백산을 보고 넙죽 절하면서 "활인지산(活人之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감결에는 "곡식 종자는 삼풍(三豊)에서 구하라"고 이르고 있다. 삼풍땅에는 전혀 흉년이 안 든다는 뜻인데, 여기서 말하는 삼풍은 바로 풍기(豊基), 무풍(茂豊: 전북 무주군), 연풍(延豊: 충북 괴산군)을 가리킨다. 주지(周知)하다시피 풍기는 소백산 비로봉과 소백산 자락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들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땅으로 서쪽과 북쪽엔 국망봉과 도솔봉에 이르는 소백산 연봉들이 병풍처럼 솟아 있고, 동쪽과 남쪽엔 야트막한 산줄기들이 겹겹으로 펼쳐 있기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쳐져 있는 가운데 동쪽과 남쪽은 별로 높지 않은 구릉이어서 시야가 훤히 트인 곳이다. 풍기에서 바라본 소백산 연봉들은 산모양이 아주 부드러워 웅장하면서도 사람을 위압하지 않기에 후대의 지리학자 청화산인(靑華散人) 이중환은 명저(名著) 택리지(擇里地)에서 " 멀리서 바라보면 봉우리가 솟아나지 않았고, 엉키듯하며 떠가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과 같이 하늘에 닿아 북쪽을 막았고, 때로는 붉고 흰구름이 위에 뜨기도 하는 천하명산"이라고 읊으면서 "마치 구름이 겹겹으로 엉기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칼날처럼 날카롭게 뻗어 험한 살기(殺氣)를 품고, 또 그 살기로 숱한 젊은이들의 고귀한 목숨을 앗을 만한 산줄기들은 이곳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풍기에서 보면, 소백산은 고고한 영혼을 지니고 대하(大河)와 같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품어안는 어느 고인일사(高人逸士)처럼 그저 평화롭고 넉넉하게만 보이기에 동쪽과 남쪽에 펼쳐진 산줄기들엔 봄에 부는 산들바람처럼 은은한 생동감이 감돈다. 겹겹으로 부드럽게 뻗어나간 모양은 흡사 미풍에 밀리면서 고요히 출렁이는 잔물결과 같고, 또 아득히 먼 곳의 산봉우리들은 하늘과 어우러져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기에 대평화의 기운이 어려있어 이곳에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온 우주 삼라만상과 일체가 되어 살도록 만들기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한다. 해서 정감과 이심은 "십승지 삼풍의 기운을 얻은 이들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게될 후천개벽의 새 시대의 문을 열게 될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바로 사람과 산천과 하늘의 힘을 모아 새 세상을 가꾼다는 것이다. 하지만, 옛 선지자들이 배달강산에서 가장 복된 땅(福地)으로 꼽았던 이 땅에도 한 가지 흠이 있으니, 도솔봉과 연화봉 사이 즉 죽령(竹嶺) 고개가 움푹파여 소위 풍수학에서 말하는 요풍(凹風: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가 움푹 들어간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으로 아주 흉하게 여김)으로 매서운 서북풍을 막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곳 사람들도 간간이 그 해를 입었다. 감결의 저자도 그걸 염려하여 "왕의 수레가 풍기 남쪽으로 가면 약간의 화가 미치리라"고 전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외적의 침입을 받아 왕이 남쪽으로 피신한 일은 두 번 있었는데, 홍건적이 침입하여 공민왕이 대구로 피신했던 것이 첫번째고, 민족상잔인 6.25동란 떄 수도를 부산으로 옮긴 것이 두번째다. 감결의 예언처럼 6.25 때 소백산에서 국군과 인민군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서 소백산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사람들 조차도 산에서 내려와야 했던 것이지만,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복된 땅(福地)의 영향으로 다른 지방 사람들만큼 참담한 화를 입지는 않았다.

 풍기의 토질은 소백산처럼 오색토이다. 흙빛은 아주 맑고 깨끗하며 흙에서 생기가 넘쳐 여기서 재배하는 풍기인삼은 효능이 산삼에 버금간다고 하는 바, 이같은 풍기인삼은 몸집이 굵고 색깔이 흰게 특징이다. 풍기인삼의 역사는 조선조 중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인삼재배를 권장하였던 것이 그 효시로 풍기에서 인삼을 제일 먼저 재배한 곳이 바로 감결에서 천하제일복지라고 일컫은 금계동으로 이곳에서는 도솔봉과 연화봉 사이의 요풍이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 그래서 이곳에는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와 살았다. 일제 말기인 1930년 대에는 평안도 연변, 덕천 등지에서 이주한 이들이 많았는데, 모두들 감결이 전한 말세가 가까웠다고 믿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감결에서 "말세의 재앙을 피하여 몸을 보존하려면 십승지로 가라"'고 이른 대로  십승지 중 제일승지(第一勝地)인 풍기땅을 찾았던 것이다.

 십승지 중 제일복지인 이곳을 찾아온 평안도 이주민들은 고향을 떠날 때 직조기를 몇 대씩 가지고 와 풍기에다 인견직물공장을 차렸는데 풍기의 인견산업은 일제 말엽 중앙선 개통으로 더욱 번창했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대규모 직물공장들이 군수품을 생산할 때는 큰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70년대 산업화가 진전된 후엔 우리나라 농촌이 거의 다 그렇듯 이곳에서도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십승지를 찾아 아주해 온 사람들의 후손들도 대부분 풍기땅을 떠났다. 이는 다른 십승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감결을 지은 정감과 이심 및 격암유록의 저자 남사고는 이를 이미 알고 "십승지로 처음 들어간 이들은 모두 되돌아 나온다"고 기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만큼 엄청나고 커다란 환란이 온 세계를 덮친다고 했다. 언제 그 환란이 도래할 것인지는 알 수없지만(실은 알 수없는 게 아니라 말할 수 없지만), 지금 공해, 화석연료의 과다사용으로 인한 지구환경파괴와 이로인한 기상이변, 전쟁, 기아, 핵무기, 핵방사능 유출, 과소비로 인한 삼림훼손(森林毁損)등으로 앞으로 인류의 미래는 이 문제들을 잘 해결하지 않으면 암담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들의 탐욕으로 인한 환경파괴로 인해 이미 수많은 종의 생물들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으며, 산업화와 이상기후로 농토가 사막화 되고, 해마다 수억의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릴뿐만 아니라 수백만 어린이들이 헐벗고 굶주리며 갈 바없이 헤매다 짧은 생을 마감한다. 잘 사는 나라에선 과소비로 인한 음식이 남아돌아 썩어가면서 먹다 버린 음식쓰레기들이 쓰레기의 산을 이루는데도 불구하고 한편에선 식량부족으로 헐벗고 굶주리다가 죽어가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겠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 사람살이의 방식이 온전하게 새로워져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대예언가 남사고가 쓴 격암유록은 앞으로 올 이같은 대환란의 참상을 활동사진처럼 전하면서 그 환란을 막는 길은 오직 "하늘 같은 마음"에 있다고 전한다. 남사고는 격암유록에서 "십승지 삼풍에 깃들여 있는 대평화의 기운, 즉 생명을 살리는 기운이 하늘마음을 지닌 이들에게 전해지리라" 했다. 온 우주 삼라만상을 내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십승지 삼풍에 서린 아름다운 기운을 얻어 온갖 고통 속에 헤매는 중생들을 구제하고 그들과 더불어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새 시대의 문을 연다는 것이다.

 

3. 찾아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를 이용 단양I.C 혹은 풍기 I.C로 나간 후 5번 국도나 36번 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단, 희방사, 희방계곡, 비로사, 죽계구곡, 석천계곡, 월전계곡 및 소수서원과 풍기로 들어 갈려면 풍기I.C를 이용해야만 한다.

 

4. 주변 관광지

 

 단양쪽에 옥순봉, 구담봉, 사인암,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등 단양팔경과 또아리굴, 노동굴, 고수동굴, 구인사, 온달산성 등이 있고, 풍기쪽에는 희방사, 비로사, 석륜사, 금계바위, 죽계구곡, 석천계곡, 소수서원, 순흥어숙묘, 비봉산성 등이 있어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가 풍부하다.

 

 

지인의 글 옮겨 놓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