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12 영해를 불법침입조업하던 중국어선을 단속하던 해경팀장(이창오 경장)이 중국어선의 선장이 휘두른 25cm의 작업용 칼에 防劍服 옆구리를 찔리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 뉴스를 보면서 불현듯 만리장성이 떠오른 것은 나만의 소회가 아닐 것이다.
중국인들의 특성은 내부와 외부를 철저히 차단하면서 내 것을 보호할려고 하는데 있는 바, 이것이 가옥으로 나타난 것이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되도록 고안된 전통적인 중국인들의 'ㅁ'字形 가옥구조고, 국가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이들의 특질은 '남의 영토를 치고 들어가 담 쌓고 "내 땅"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로 고스란히 구현된 것이 바로 인공위성 상에서도 보인다는 소위 만리장성이다.
본디 만리장성은 진나라 시황 영정이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한 통일제국의 미래에 대해서 점을 쳤는데, 술사가 이르기를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胡다"라고 하자 이를 영정의 둘째 아들 胡를 지칭하는 말인줄 모른체, '오랑캐'를 지칭하는 말이라고만 착각하여 서북쪽의 오랑캐들을 방어하고자 서쪽의 가욕관(嘉山+谷關)에서 부터 동쪽 끝 山海關까지 장장 6254km, 평균 높이 6 ~ 9m, 평균 폭 4 ~ 5m의 장성을 축성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중국 역대 왕조들의 숙원사업이 되면서 속행되다가 명나라 때에 현재의 장성이 완성된 것으로 天安門, 진시황 兵馬俑과 함께 중국을 상징하는 3대 얼굴이 되었다.
명나라를 세운 태조 朱元璋은 왕조의 창업을 이루기 전 朱升이라는 隱者를 만나서 국가의 경영방도를 물었는데, 이 때 주승이 답하기를 "담을 높이 쌓고(高築墻), 식량을 모으며(廣積糧), 늦게 왕을 칭하라(緩稱王)"라고 하면서 역량을 쌓고 정세를 잘 파악해 주변세력으로 부터 반감을 사기 이전에 담을 높게 쌓으라고 하여 방벽쌓기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주원장은 이를 그대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중국인의 이같은 사고는 역대 왕조에 두루 나타나 '사람을 한데 모아 성을 쌓는다'는 뜻의 '衆志成城'의 성어가 늘 유행하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이 단결하면 성벽을 이룬다는 이 말에서 '방벽', '담' 등이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유추할 수가 있다. 이는 과거의 왕조에만 그치지 않고 현 중국의 집권자인 공산당도 소련과 미국을 상대로 위기의식을 강조할 때마다 毛澤東 등 역대 중국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늘 강조하였든 "깊이 굴을 파고, 식량을 모으며, 함부로 패권을 내세우지 않는다[深手+穿(손으로 구멍후벼팔알)洞, 廣積糧,不稱覇]"를 주창하는 바, 이는 주승이 주원장에게 건넨 충고와 비슷하다. 이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國歌에도 그대로 나타내고 있으니 중국의 국가인 '義勇軍行進歌'에 "우리의 피와 육신으로
우리의 장성을 쌓자(血肉長城)'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같은 중국인들의 담쌓기가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남의 영역을 먼저 치고들어가 先占할려는 '확장의 담'일 경우에는 항상 문제가 되었는데, 그 실례가 바로 지금의 만리장성이다. 만리장성이 들어선 지역이 원래는 중원지역의 중국인들 거주지가 아니라 북방의 유목민들 거주지였다는 사실이 조사결과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어 이들이 유목지역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그곳에 방벽을 쌓은 뒤 유목민들 담 밖으로 몰아낸데서 보듯이 중국인들의 확장의 담이 주변국들의 싸움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이같은 중국인들의 욕심은 급기야 '서쪽 끝 가욕관에서 동쪽 끝 산해관'이라는 기존 만리장성의 전통적 길이 개념을 '동쪽 끝 산해관에서 랴오닝(遙寧)과 지린(吉林)을 지나 압록강까지 이어지는 선'을 만리장성에 이어붙이는 '유동적인 담'으로 변질시켜
총 연장 8800여km라고 말하므로서 중국과 이웃한 한국과 주변국들을 다시 한 번 더 경악시키면서 긴장시키고 있다.
조선 조 후기인 17세기 중국을 방문하고 귀국 후 명저 '熱河日記'를 지었던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중국은 3里마다 성이 들어서 있다'라고 감탄했는데, 그가 감탄한 중국의 담 중 걸작이 바로 위에서 설명한 만리장성인 바, 이를 두고 수 많은 故事와 名詩가 난무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前漢 元帝 때의 後宮으로 흉노족장에게 시집을 간 王昭君(? ~ ?)怨歌와 唐代 시인들로 부터 唐詩의 絶唱으로 불리우는 王維(701 ~ 761)의 西域으로 먼 길을 떠나는 친구와의 이별을 주제로 한 別離詩인 '위성에서 원이를 안서로 떠나 보내며(送元二使安西)'다.
후한(後漢) 때의 《西京雜記》에 의하면,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고, 그 때문에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어 버렸다. 소군이 말을 타고 장안문을 나서는데, 배웅나왔던 원제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하였으므로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원제는 크게 노하여 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毛延壽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晉)나라 때에는 문제(文帝) 사마 소(司馬昭)의 이름과 글자가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군(王明君)이라 하였고, 명비(明妃)라고도 불렸다. 그 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사에 허다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소군사(昭君辭)》《명군탄(明君歎)》이라는 한나라의 악부(樂府)가 가장 오래 된 것이고, 그녀를 소재로 한 희곡으로는 원(元)나라 때의 馬致遠이 지은 《파유몽고안한궁추잡극(破幽夢孤鴈漢宮秋雜劇:漢宮秋)》이 가장 유명하다. 이외에도 진나라의 석계륜(石季倫)이 지은 《왕명군사병서(王明君辭幷序)》가 있고, 당(唐)나라 이후 李白 ·白居易 등 많은 시인들이 그녀를 소재로 시를 읊었다. 또 둔황[敦煌]에서 발굴된 《명비변문(明妃變文)》에 의하여, 당말 오대(五代)경부터 口傳文學의 소재가 되었음이 밝혀졌다. 현재까지 회자되는 唐詩로는 '春來不似春'이라는 고사를 낳게 한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지은 五言節句詩가 가장 유명하다.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꽃과 초목이 없으니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같이 않아라 自然衣帶緩 허리끈이 느슨해진것은 非是爲腰身 몸과 허리 때문만은 않으리
葡萄美酒夜光杯 좋은 포도주 야광 술잔에 따라 마시는데
欲飮琵琶馬上催 마시려 하면 빨리 나가라고 말위에서 피파소리로 재촉하고
醉臥沙場君莫笑 취해 싸우다 모래밭에 누웠다고 웃지 마시게
古來征戰幾人回 예부터 전쟁터에서 돌아온 이 몇이던가
秦中花鳥已應闌 장안에는 꽃과 새 이미 돌아가서 저무는데
塞外風沙猶自寒 새외의 바람 부는 사막은 아직 차가와
夜聽胡笳折楊柳 밤에 들리는 오랑캐 피리소리인 절양류 곡조
敎人意氣憶長安 사람들 마음에 장안이 생각나게 하네
* 夜光杯 - 흰옥으로 만들어 야간에 빛나는 술잔
* 折楊柳 - 横吹曲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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