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의 늪 / 박하
편지를 다 쓰니 저녁이다.
마감시간 전, 우체국에 가려니 마음이 급하다.
아무리 급해도 열흘 앓은 환자처럼 창백한 맨 얼굴로 외출할 수 없지 않는가.
세수 얼른 하고 스킨로션을 바르고 붉은 립스틱을 칠하니 얼굴에 화색이 돈다.
청치마에 꽃이 수놓인 하얀색 티셔츠를 받쳐 입고 수십 통의 편지봉투를
가방에 넣어 집을 나서니 우편집배원이 된 기분이다.
우체국에 들어서니 직원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우편물 담당하는 남자직원 앞으로 다가가 우표 50장을 달라고 했다.
우표 값만 주면 알아서 처리해주지만, 잡지책을 뒤적거리며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한 예감이 들어 고개를 드니 남자직원이 꿈에 취한 듯 미소 지으며
날 쳐다보는 게 아닌가. 시선이 마주치자 당황해하며 고개를 숙인다.
왜 미소를 지은 걸까. 내 모습이 우아해서일까.
틀림없이 나한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숫기가 없어서 주저하고 있다.
우체국을 자주 애용하는 고객이라고 고마워서 차 한 잔을 사주고 싶은 걸까.
두세 살 아래로 보이지만 놀랄 필요는 없다.
요즈음은 연하의 남자가 연상의 여인을 좋아하는 세대풍조이기에.
갑자기 자신이 열아홉 살 처녀인 양 가슴속에 화들짝 복사꽃이 피어난다.
확실히 나한테 호감을 갖고 있는데,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남자가 딱하다.
데이트 신청하면 거절할까봐 저리도 말 못하고 주저하는 걸까.
바보 같은 사람! 용기 없는 숙맥이지만 오히려 그 순수한 면이 마음에 든다.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자꾸만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어쩜일까.
해질녘이다.
그림자 길게 드리우는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한국여성의 표준체격이라 참해서일까.
상가 유리창에 어렴풋이 비치는 낯익은 모습이 오늘따라 더 정겹다.
아직도 자신의 외모가 뭇 남성의 시선을 끌만큼 매력적으로 보이는 걸까.
앞으로 얼마든지 연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뺨이 붉어진다.
'연인'의 여자 주인공 마그리뜨 뒤라스는 아들 같은 청년하고 사랑하지 않았던가.
마음은 파란 하늘에 애드벌룬처럼 둥둥 떠간다. 이다음에 만나자고 하면 거절할까,
하지 말까. 상상의 꼬리연은 꼬리에 꼬리를 잇는다.
신호등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초록 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웬 숙녀가 내게로 사뿐히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저어 아줌마, 티셔츠 거꾸로 입었네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순간! 재빨리 살펴보니 거꾸로다. 소매와 옆구리에 불거진 솔기며
마구 헝클어진 수실들이 마치 미친 여자의 머리카락 같다.
얼굴이 화덕처럼 달아오른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꼭꼭 숨어버리고 싶다.
세상에 어디 여자가 칠칠하지 못하게 옷을 거꾸로 입고 활보했단 말인가.
조금 전까지의 당당함과는 달리 행여나 아는 사람 만날까 봐 뒷동산의 할미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아까 우체국 직원도 옷을 거꾸로 입었다는 말을 해주려다 상대방이 무안해할까 봐
민망해서 말해주지 못했나보다.
며칠 전, 친구의 얘기가 생각난다.
중요한 모임이 있던 날, 참석한 부인들이 경이로운 시선으로 친구를 바라보더란다.
친구는 속으로 자신이 예뻐서이겠지 여기며 테이블로 가서 우아하게 앉았단다.
축배의 잔을 들며 크리스털 잔에 살짝 입술을 적신 후, 무심결에 귓가를 만지다가 깜짝 놀랐단다.
귀걸이가 없었기에. 버스손잡이 만한 귀걸이를 한 쪽만 뻔쩍거리게 달고서 외출했더란다.
연예인도 아니면서. 하긴 요즈음 젊은 남자연예인들이 멋으로 한쪽 귀걸이를 달지만….
사람들은 모두 제 잘난 맛에 사나보다.
「백설공주」의 요술거울처럼 美의 주술을 거는 여인들은 동화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상당수 많다. 친구와 나는 美의 안개 속 미로를 즐기는 범주에 속한다고 할까.
허지만 착각의 늪에 빠진 순간은 행복했다.
불륜의 늪은 한 번 빠지면 수렁이 되어 빠져나오기 힘들지만,
착각의 늪은 아무리 빠져들어 가도 상상에 그칠 뿐 현실로 돌아오게 한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속삭여준다. "사모님, 착각은 자유입니다"라고.
또다시 착각의 늪에 빠지려한다.
그대여, 그대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가.
배경음악: 먼 훗 날(가랑잎) / 에보니스
영상편집: 칠성원두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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