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인의글

顔瓢憲墻/ 안빈낙도

顔瓢憲墻/ 안빈낙도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 안회(顔回)의 표주박을 ‘안표(顔瓢)’라 하고, 역시 공자의 제자인 원헌(原憲)이 가난 속에서도 도(道)를 즐겼던 그의 초라한 흙 담을 ‘헌장(憲墻)’이라고 한다. 구차한 동네에서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 표주박의 물로도 도(道)를 즐기면서 살 수 있는 자는 안회 하나일 것이라고 공자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그가 일찍 죽자 공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고 까지 고백했을 정도였다. 안회는 구차한 가난에서도 평안하게 살고 그 위에 도(道)를 즐길 수 있었기[安貧樂道] 때문이었다.
스승 공자가 죽은 뒤에도 원헌(原憲)은 노(魯)나라에서 살았는데, 집 주변이 온통 잡동사니가 담 밑에 가득하였고 띠 풀과 진흙을 이겨서 덮은 지붕엔 풀이 크게 자라고 있었다. 풀과 나뭇가지로 삽짝 문을 만들어 온통 문드러졌으며, 옹기 조각으로 창문을 삼고 뽕나무 가지로 문지도리를 삼았고, 비가 올 때면 지붕이 새서 아래가 질펀하였다. 그래도 마을 가에 단정히 앉아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벼슬로 크게 출세한 자공(子貢)은 큰 수레에 화려한 옷을 입고 검고 붉은 외투에 흰 피부를 하고서 원헌의 마을에 기운차게 들어왔다. 원헌의 집 좁은 길은 도무지 마차가 들어갈 수가 없어, 내려 걸어서 원헌을 만났다. 뽕 잎으로 엮은 모자를 쓰고 명아주 대로 만든 지팡이에 의지하여 문을 열었다. 뽕 잎을 엮은 띠가 끊어진 모자에, 웃옷은 팔꿈치가 다 나왔고 신발은 발뒤꿈치가 땅바닥에 닿았다.
“아, 선생은 무슨 병[毛病]이라도 있소?” 원헌이 웃었다, “내 듣기로 재물이 없으면 빈궁하다고 하오, 배운 것이란 남을 돕는 데 쓰는 것인데 배운 바를 자기 이익을 취하는데 만 쓴다면 인(仁) 속에 숨은 죄악에 집착함이니 수레와 말을 장식한 것은 내가 차마 마음에 견딜 수 없소.” 자공이 배회하며 들어 가지를 못하고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작별을 고하고 떠나갔다. 원헌은 느긋이 돌아오면서 지팡이를 짚고 상 나라의 노래[商頌]를 부르니 천지에 소리가 가득하였다. 마치 쇠와 돌들이 소리를 내듯이, 황제도 그런 신하를 많이 가질 수 없고 제후라도 그런 당당한 친구를 많이 가질 수 없으리라. 누가 능히 그를 능멸 하겠는가? 시경의 노래다, “내 마음 한 덩이 돌이 아니라서 남을 따라 쉽게 옮겨 놓을 수가 없고, 내 마음 하나의 깔개 자리가 아니니 남이 펴고 또 말 수가 없네.” 사람이 가난하여도 뜻은 가난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얘기다. 안회를 일컬은 공자의 표현인 안회의 가난한 모습인 ‘대 그릇 하나의 밥과 표주박 한 바가지의 물인 일단사일표음(一簞食一瓢飮)은 우리 선비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말이다. 그로서 단표(簞瓢), 일호(一瓠) 등으로 호(號)를 삼은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번역했던 문집 표옹유고(瓢翁遺稿)의 저자 진천송씨의 송영구(宋英耈/ 1556-1620) 족조의 호도 그렇게 삼아서 표옹(瓢翁)이다. 안회와 원헌의 안빈낙도를 겸한 표현이 안표헌장(顔瓢憲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