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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時享 變化/ 시제의 변화

時享 變化/ 시제의 변화


 오늘은 음력 시월 초하루, 우리 전통은 예스럽게 음력 시월은 상달[上月]이라 했다. 최고 좋은 달이란 말로, 햇 과일과 햇 곡으로 신(神)에게, 조상에게 제(祭)를 올리기에 가장 좋은 달이기 때문이었으니 우리가 보다 더 종교적인 민족이었을까? 마음이 더 곡진한 경향성을 지나고 있는 걸까. 고대로부터 우리는 신에게 제사를 올렸고, 조선 후기에 와서는 더욱 지극히 제사에 열심이었다. 유교적 제례가 고려 때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는 만연한 우리의 풍속이 된 시향(時享)의 천신(薦新)이 문중마다 산소마다 시행되어왔다. 근년에 와서는 그 열기가 다소 정체된 추세인데, 지난해에는 갑자기 밀어닥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코비드-19의 전염병 때문에 거의 중지 상태에 이르렀다. 그래도 근년의 시제(時祭) 근황을 종중(宗中) 차원에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리의 시월 시제는 변해야 하는가? 아니 어떻게 변해야 할까?
 코로나 재변(災變)이 덮친 2020년 이전 해까지도 이미 변하고는 있었다. 우리의 조선 후기의 풍속이 이어져 온 음력 10월에 우리 선조의 산소에는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성묘(省墓)를 하고 새 수확으로 빚은 제수를 올리는 시향(時享), 또는 시제(時祭)를 해야 했다. 그런데 시속(時俗)의 변천으로 거의 의무처럼 여기던 자손들이 참제(叅祭)에 소홀해지면서 제관이 퍽 줄었다는 사실은 성씨를 망라해서 거의 보편적이다. 그로서 궁여지책(窮餘之策)에 간소화 경향에 다가 각각 모든 선영(先塋)에 일일이 성묘하고 묘제(墓祭)를 직접 다 가서 지내던 일을 산소는 납골당으로 한 곳에 모아 놓고 제사하는 집안도 생겨났고, 산소는 그냥 두고 한 곳에 단비(壇碑)를 세우고서 한 번에 제향을 하기도 하며, 또는 산소들은 그대로 두고 재실(齋室)에 지방(紙榜)이나 위패(位牌)를 만들고 선대의 여러 선조들을 한꺼번에 합사(合祀)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전통을 보수로 옛날을 고수(固守)하는 문중도 아직은 많지만 여러 성씨 공동체의 변화된 조짐은 늘어가는 추세인 건 분명하였으니, 시향 변화의 물결은 진행형이었다.
 나의 한 종중(宗中)의 경우도 2013년부터 16대조부터 7대조까지 10세의 직계 선조 시향은 재사봉향(齋舍奉享)-재실에서 재사를 한꺼번에 올림-으로 변경하여서 이태 전까지 8년 째 시행하고 있었는데, 지난해는 코로나로 인하여 궐사(闕祀)할 수는 없어서 대표 서너 명만이 조촐하게 시제를 올렸다. 그러니까 산소에 가서 묘제(墓祭)는 아니 하고 제관들이 편리하게 재실에서 한 번에 합사(合祀)를 한다는 말이다. 과연 그것이 합당한 것인가 는 그다지 논의하지 못한 채 자손이 시향에 오는 이가 아주 적고, 그나마 제관은 대개 7, 80세 고령이 대부분이라 산 높이 또 산재(散在)한 묘소에 다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에 불가불 재실에서 한다는 합리화일 뿐이다. 그래도 산소의 벌초(伐草)는 매해 하니, 자손들이 거의 성묘함이 없는데도 벌초를 왜 하지? 그건 또 남이 지나다가 혹 보더라도 방치한 모습이 부끄럽다는 무언의 논리가 거기 내재한다. 해가 갈수록 성묘가 없다면 산소의 위치를 아는 이도 줄어들 것이고, 마침내 는 어찌 되겠는가? 재사봉향의 시제가 제관에게는 아주 편리한 이점이 있지만 과연 시제는 왜 하는가 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우리가 이제는 대답을 강구함이 옳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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