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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雪興訪友 / 왕휘지의 일탈

雪興訪友 / 왕휘지의 일탈

오늘 대한(大寒)인데 어제 서울은 겨울 눈이 펄펄 쏟아졌다. 눈길을 걸으며 아이가 된 듯 즐거움에 1600년 전 동진(東晋) 때 왕휘지(王徽之/ 338-386)의 일탈(逸脫)이 생각났다. 그가 살았던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小興市)인 그때 산음(山陰)엔 아마도 드물었을 눈이 어제처럼 쏟아졌던 모양이다. 눈 그친 저녁 휘영청 달까지 떠오르자 술기운에 시 한 수를 외운 그가 불현 듯 친구 생각이 났다. 그때 거긴 수로(水路)가 발달한 모양, 작은 배를 동자(童子)로 젓게 하여 지금의 소주(紹州)인 섬계(剡溪)를 따라 대규(戴逵/ 326-396)네 집으로 갔다. 친구의 문 앞에까지 닿았는데, 동자를 시켜 그는 뱃머리를 돌려서 되돌아왔다. 글씨의 대가인 아버지 왕희지(王羲之)의 5째 아들인 왕휘지도 글씨를 잘 썼고, 그의 친구 대규는 그림과 악기를 잘 연주한 지금의 개념으로 치면 예술가들이다. 눈 속에 힘들게 먼 길을, 그것도 밤에 찾아갔으면 다정히 마주 앉아 회포를 풀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을 두고 오랜 세월 시객(詩客)들은 눈 속에 친구를 찾은 설중방우(雪中訪友), 설흥방우(雪興訪友), 눈 내린 밤에 대규를 방문했다고 설야방대(雪夜訪戴)라고도 했다. 왕휘지는 술이 다 깨서 그랬을까? 사람들이 까닭을 물었다, 게까지 갔는데 어찌 친구를 만나지 않고 돌아 왔는가? 엉뚱한 대답이었다. 친구 보고 픈 흥이 나서 갔고 흥이 다하여 돌아왔는데(乘興而行 興盡而返), 꼭 만나야 하는가? 보통으로는 생각하기 쉽지 않은 왕휘지의 일탈 행위에 조선 선비들까지 고려 때부터 지금까지 그게 화제가 되었고 그에 대한 시도 여럿이 전해오며, 그 그림까지 그린 조선의 큰 화가들도 여럿이었다 네. 그 중의 하나가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의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가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을 정도이니까.

곧은 대나무가 없는 집에서는 하루도 못 산다고 했던 그의 자호(字號)가 자유(子猷)라 흔히 왕자유(王子猷)라고 불러지는데, 실상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까마득한 옛 사람이다. 그땐 아직 고구려의 우리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태어나기 훨씬 전이고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왕위에 아직 오르기도 전이다. 서양의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 회개하고 아직 사제(司祭)가 되기도 전이다. 남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감성과 소신대로의 대범한 삶을 살았다. 벼슬도 버리고 귀향하였는데 동생 왕헌지(王憲之)가 먼저 죽어 문상을 가서는 울지도 않았으며, 동생이 즐겨 타던 거문고로 대신 연주하려 했지만 소리가 나지를 않았다, “오호 아우 자경(子敬)아, 사람 가니 거문고도 함께 갔구나(嗚呼 子敬, 人琴俱亡)!” 그 길로 앓다가 몇 달이 못 되어 아우를 따라 갔다네. 그 옛날의 생각이 오늘날의 사람들과 기분이 비슷하지 않은가? 예술인의 일탈(逸脫)된 모습이긴 해도 우리가 반드시 법도와 상식에만 얽매여 살라는 법은 없다. 자기의 흥(興)을 따라 마음이 동하는 대로 즐거움을 구가하려는 건 사람의 본성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왕자유의 그런 엉뚱함이 아니었다면 그 에피소드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화제가 되진 못했을 테니까. 누가 뭐래 든 눈 내리는 날 강아지처럼 흥에 겨워 때론 눈길을 뛰고 싶은 적이 있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