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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길동무 / Little Samaritan

길동무 / Little Samaritan

인류는 길게 걸으며 생존해왔다. 긴 인생행로(人生行路)엔 길동무와 종종 동행한다. 먼 길손은 자주 외롭고 지루한 여정이라 좋은 길동무를 만나면 한결 가볍고 기쁜 여행이 가능했으니 그 가치가 크지 않았던가. 20리 장보러 가는 길에도 두런두런 장꾼들의 동행이 있고, 험한 재를 넘을 땐 강도와 산짐승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산 밑에서 보행자를 기다려 길동무를 삼아야 함께 떠났던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 에피소드를 대표하는 이야기가 곧 누가복음(10장)이 전한 ‘선한 사마리아인(the Good Samaritan)’이다. 예수의 비유로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을 지경에 처한 나그네를 기꺼이 그리고 헌신적으로 구원해주고, 여관비와 노자까지 주면서 보살폈던 아름다운 사람이 인간의 최고 이웃이라는 대표적 스토리다.

자기 자동차를 타고 쌩쌩 달리다가 보니 이젠 길동무란 말조차 서툴러지게 될 지경이다. 은유적으로 인생의 반려자(伴侶者)라든지 삶의 길동무는 아직도 필요하지만 그 어휘는 바뀐 것 같으니 멘토(mentor)니 사업의 파트너, 동창이나 동호인들로 보다 실리적 측면의 동무들로 변한 것 같다. 그래도 ‘길동무’가 토속적이며 정감이 가지 않는가? 좋은 길동무는 굳이 달변가라야 재미있는 건 아니다. 새론 호기심과 진솔한 정감이 통하면 된다. 힘든 길도 길동무와 함께라면 고생스럽지 않게 갈 길을 다 갈 수가 있을 테니까. 자동차 속에서 만날 일이 없어 길동무가 필요하지 않고, 장엘 가질 않고 쇼핑을 가니 길동무가 별로다. 오랜만에 나는 이스탄불에서 경야(經夜)하는 큰 버스를 타고 지중해 남쪽 항구인 안탈리아로 가는 차 옆자리에서 우연찮게 길동무를 한 사람 만나서 열 시간 정도 동행했다. 터키인 파이잘 핀콘(Fasal Fincon), 상상도 못했던 터키의 동쪽 멀리 내륙의 외진 곳인 듯, 디야르바키르(Diyarbakir) 인근 작은 도시 에르가니(Ergani) 사람이다.

실로 적극적인 태도의 규범이라고 할 만하였으니 말과 행동이 실로 압도하는 긍정적인 태도였다. 터키 말만 할 줄 아는 사람인데 언어로서 가 아니라 호감과 적극성으로 보디 랭귀지(body language)가 통하는 사람의 표본 같았다. 어디 딴 나라 사람인 줄 추측했는데, 터기 동쪽 시리아와 이락이 멀지 않는 터키 내륙에서 왔네. 몇 시간에 어느덧 지기(知己)가 된 듯 버스가 멈춰 쉴 때는 어김없이 사람들과 어울러 사진을 찍고, 싸들고 온 터키에서 유명하다는 단 것을 고급 포장 채 내놓으면서 자꾸 권하였다. 옆에 탄 우크라이나 아가씨 둘과 합께 넷이서 통역도 없이 추측과 상상을 동원한 소통이 진진했다. 입에서 녹는 너무 달콤한 걸 자꾸 권해서 세 개나 먹었는데 칼로리가 높고 너무 맛있어 그처럼 나도 뚱뚱해질 것 같은 감이 들 정도. 꼭 자기 집에 오라고, 맛있는 그 스낵 만 아니라 온갖 요리가 다 있다며 강력하게 권하여 꼭 전화 하란다. 나의 목적지보다 조금 먼저 내릴 때는 가슴에 손을 진지하게 얹으면서 뭉클한 정을 표하니 말을 몰라도 사랑이 듬뿍 전달되어 한 작은 사마리아인을 내가 만난 것이었다. 인간의 정(情)과 사랑은 말을 못 알아들어도, 문화와 인종이 달라도 가능하다는 걸 내게 보여준 밤이었다. 아, 세상에는 그런 작은 사마리아인이 아직도 곳곳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인간 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주지 않는가, 나도 너도 작은 사마리아인이 되는 가능성이 있어 더 나은 천국을 만들 수 있기에 말이다. 가상(架上)의 최후 순간에도 ‘그대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던 선포는 이 수난 주간에 다시 울린다. 굳이 오랜 친분이 아니어도 순간의 사랑도 천국을 그렇게 소유한다고 보여주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작은 선한 사마리아 인이 지금도 세상에는 천국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