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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충신은 효자의 집에서 / 忠孝同心

충신은 효자의 집에서/ 忠孝同心

충신은 효자의 집에서 찾아야 한다는 중요한 이치를 일찍이 옛 사람들은 터득했다. 후한서(後漢書 韋彪傳)에 공자를 인용해 효자가 나라의 충신(忠臣)이 되는 원동력이라고 해석했다. “공자가 일렀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는 고로 그것이 임금에게 옮겨갈 수가 있으니, 이는 곧 충신은 효자의 집안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孔子曰, ‘事親孝 故忠可移於君, 是以求忠臣 必於孝子之門).” 충효 동심(忠孝同心), 유가(儒家)의 강령엔 충효(忠孝)가 붙어 다녀서 효성은 나라에 충성하는 정신과 같은 마음의 원리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효도와 함께 충성이란 의미마저 쇠퇴하는 문화 현실. 충성이 임금에게 목숨까지 바친다는 이해가 민주 사회 정신과 맞지 않는다고 하나, 충(忠)이란 실상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는 지극한 정성을 그린 것이다. 나 이상의 대상인 나라와 같은 공동체 곧 공동의 운명을 책임질 진정한 정신이 없다면 인류 사회는 결코 존립 할 수가 없지 않는가. 충성은 옛날의 왕 개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공동 사회를 유지해야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역시 내가 존재할 수 있는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부모를 사랑하고 효성을 다하듯이 충성의 마음도 같은 정성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삼강오륜(三綱五倫) 유교 문화의 근간이며 효의 바탕에서 성립할 수가 있는 것이다. 충성도 효도에서 시작하고, 공경의 사회적 인간관계도 효도에서 발전한다는 것이 공자와 맹자의 생각이었다.

내 부모님을 섬기듯 이웃의 노인을 대하고, 점차 나와 친분이 멀어지는 사람들에게 까지 차차 미치게 하는 것이 경로 사상(敬老思想)이며 사회를 예의의 공동체로 만들고, 나아가서 인류 사회의 평화를 이룩한다는 논리이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를 사랑할 수가 없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과 사회나 나라를 사랑할 수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효도가 인간 삶의 핵심적 기초가 된다. 동양에서 기독교를 받았을 때 종교보다는 하나의 새 가르침으로 보았기에 유학(儒學)에서 서학(西學)이라 이름 하였다. 유학에서는 동양에 새로 들어온 서학에다 가 제일 먼저 충효(忠孝)의 잣대를 들이댔다. 효도의 연장인 제사(祭祀)를 소홀히 하므로 효도에서 탈락 되었다고 박해가 시작된 것이 아니었나. 실상은, 예수의 효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예수는 십자가의 우주적 사명을 위한 자기 희생의 최후 순간에서도 “보라, 네 어머니 라!(요19:27)”고 특별히 가장 젊고 사랑했던 요한에게 십자가 밑을 내려다보면서 그의 어머니와 요한이 보는 가운데 한 말이 아닌가. 자기의 최후의 순간까지 효도를 실행한 이 장면보다 더 효성스러움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사도 요한도 스승의 분부를 마음에 두고 그 충성 된 실천을 지금의 터키인 에베소에까지 마리아를 모시고 와서 보살폈으니, 스승의 어머니를 모신 효성이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는 효도이며, 그것도 끝까지. 나는 지난 수난 주간에 사도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모셨던 효성의 옛 터에서 동양의 충효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