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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母懷哺乳形 / 묘소의 석물

母懷哺乳形/ 묘소의 석물

“집 치장은 남의 치장이요 묘 치장은 제 치장이다.” 대개 두 세대 전에 흔히 회자된 시골 속담이다. 내 어렸을 때 할머니도 그러셨고, 마을 노인들이 종종 언급하였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집[家宅]에서 살아야 하므로 모두 집이 있어 가꾸고 꾸며서 주거 환경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한다. 집은 잘 꾸민다 해도 정작 이사 가거나 세상을 떠나면 다 버리고 가야 하므로 결국은 그 다 남의 차지가 되니, 정작 남을 위한 치장이 되고 만다는 아쉬움이다. 한편 죽어서 의 묘소는 자신의 영택(永宅)이므로 오래 오래 거처 하므로 묘 치장이야말로 오래 나의 참 치장이란 말이 아닌가.

할아버지께서 산으로 오신지 90년 째 5월 9일 처음으로 묘전(墓前)에 상돌[床石]을 설비 했다. 상석(床石)이라고 흔히 말하니 시제 때에 제물을 진설 하는데, 왕릉에서는 상석이 없고 혼유석(魂遊石)이라 하여 묘소 앞에 넓은 돌은 혼령이 때로 나와서 쉬고 놀기도 한다는 옛 사람들의 상상에서 나온 표현 같다. 산소의 부동산 소유주는 장증손 당질(堂姪)이고, 개보수(改補修)나 면례(緬禮) 등의 변화와 관리권도 일반적으로 장손에게 있는 것이 우리의 상례(常禮)인 것 같다. 나는 조고의 막내 아드님의 아들로 참여할 권리는 있지만 관리할 권리는 없는데, 당질이 오랜만에 상석을 놓기로 결심하면서 연락했기에 함께 가서 봉토(封土)와 사초(莎草)를 곁들여 상돌을 놓고, 도래솔을 정비한 후 고유제(告喩祭)를 올렸다. 남향에 우리 옛 작은 마을을 마주하고 모진 겨울 계절에 서풍(西風)이 불어오는 방향을 뒤로 둘러 막은 형세(形勢)여서 포근하였고, 예와 달리 숲이 우거져 풍경도 좋으며, 정비한 명당(明堂)을 내가 속으로 이름 지었으니, 모회포유형국(母懷哺乳形局)이라 했다.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포근히 안고서 젖을 먹이는 형상이란 말이다. 내가 풍수를 믿지 않지만, 내 어렸을 때는 할배 산소가 동향 산등성이에 강물이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으나 바람이 세찬 지형이라 백부(伯父)께서 오래 전에 지금의 위치로 면례(緬禮)하셨다. 마음이 안정되고 느낌이 안온한 엄마 품의 어린아이가 감싸 안긴 듯 그런 모습이란 형용이다.

객지에서 멀리 살다가 시제에도 잘 못 참례 하여 몇 해 만에 영택을 배알 하니 감회가 더했고 상석으로 한결 아름답게 보여 내 마음도 기뻤다. 혹 영령이 인식하신다면 더더욱 기뻐하지 않으실까. 내 어렸을 때는 더러 선대의 묘소에 석물(石物)을 하였고, 서울에 있으면서도 가끔 타성의 묘비 제막식이나 비갈 문(墓碑銘)을 요청 받은 대필이며 또 그런 고유제에 참례한 적이 있었으나 친 할아버님 묘전이라 감개가 깊었다. 당질 형제가 물심양면으로 애를 많이 썼고, 그 두 질부도 함께 와서 수고 했으며, 재종질, 재종제 등 고유제에 함께 고유를 하는데, 제수도 갖추어서 더욱 빛이 났다. 상석에는 전면에 묘호(墓號)로 처사(處士) 본관에 송공(宋公) 휘(諱)의 묘라고 조금 크게 새기고, 좌우 측면에는 공간을 활용하여 자녀와 손 자녀 내외분들을 새겨서 그 후예를 명기 하므로 묘표(墓表) 대신 누가 혹 와서 보더라도 그 묘호와 후예를 인식할 수 있게 했으니 밝혀 보기에도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