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인의글

천자문만 제대로 익혀도

천자문만 제대로 익혀도

논어(論語 爲政篇)에 공자는 “옛 것을 연결하여 익히고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 만하다(溫故知新 可以爲師矣)” 했고, 예기(禮記 學記篇)에서는 “외워서 학문 하는 것으로는 남의 스승이 되기에는 부족하다(記問之學 不足以爲人師) 했다. 전통적인 한문 공부의 방식은 대개 외워야만 다음 과제로 진도가 나갔는데, 그 위에 문리(文理)가 터져야만 글을 응용하고 활용할 수가 있었다. 주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교재로 하여 학문을 닦았으니 그 분량이 상당하였고, 정작 마스터하기란 쉬운 과제가 아니었으며, 그 외에도 자치통감(資治通鑑), 춘추(春秋), 사기(史記) 등 많은 고전 문학(古傳文學)까지 섭렵해야 했다.

천자문(千字文)은 어떤 면에서 그 사서삼경과 고전도 부분적으로 함축한 한 편의 서사시(敍事詩)와 같다. 흔히 양(梁)나라 무제(武帝/ 502-549) 때 주흥사(周興嗣/ 469-521)가 황제의 명으로 하룻밤에 겹치는 글자가 없이 1천자로 한 편의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사언 절구(四言絶句) 형식으로 너무 힘써 짓느라 밤새 머리가 다 희었다 해서 백수문(白首文)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런데 실상은 주흥사가 미리 후한말(後漢末)과 삼국시기 위(魏)나라 초에 걸쳐 재상이었던 종요(종요/ AD 151-230)가 지은 천자문을 알았으니, 그것이 주흥사의 천자문이 지은 틀이었다는 것이다. 그 종요(鍾繇)는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본을 삼았던 사숙(私淑)이었다. 그래서 주흥사의 천자문 역시 주흥사의 창작이라 기보다는 종요의 본을 따랐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일본에는 백제(百濟)의 왕인(王仁) 박사가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일본에 최초로 가져온 인물로 기록되어서 왕인이 전한 천자문도 주흥사(周興嗣) 이전의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시대라서 종요(鍾繇)의 천자문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조선 시대에서 대한민국 신교육(新敎育) 시스템이 시작될 때까지 의 우리 과거 교육 기초가 되었던 천자문 공부는 교육 역사에서도 중요했으니, 그 내용을 잘 공부한다면 우리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데 큰 기능을 감당할 수가 있다. 유가(儒家)에서 강조하는 바도 ‘뿌리가 바로 잡혀야 진리가 살아난다[本立道生]’는 것이 그 원리 중의 하나가 아닌가. 그래서 어려서 부터 글자를 익히기 시작하면서 어린이가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에 바탕을 알게 하여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결물치지(格物致知)를 하고, 성의정심(誠意正心)하여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대학(大學)의 요지도 녹아있는 내용이 천자문이다. 공맹(孔孟)의 핵심 사상인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천자문을 어떻게 배우는 가는 이를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몫이다. 어려서는 대개 겉 핥기 식으로 그 깊이를 다 터득하기가 어려워 글자 익히기에도 벅찼지만, 실상 그것을 깊이 배운다면 이 또한 사서삼경과 유학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잘 배운다면 천자문만 제대로 익히고 응용할 줄 알아도 대단한 함눈 실력자가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천자문을 한 번 배워서 떼는 것도 귀한 의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