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인의글

遯巖書院/ 기호학파의 대표

遯巖書院/ 기호학파의 대표

논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조선 예학(禮學)을 대표하는 사계(沙溪 金長生/ 1548-1631)를 종향(從享)하기 위해 1634년에 세웠고 이어서 신독재(愼獨齋 金集/ 1574-1656)를 함께 기리다가 후에 동춘당(同春堂 宋浚吉)과 우암(尤庵 宋時烈)을 배향 하고 있으며, 조선 신유학(新儒學)의 사교육 기관이 되었다. 신유학이라 함은 서양에서 분류하는 철학의 분류 형식으로 영어로는 ‘신-정통 유학(Neo-Orthodox Confucianism)'이다. 구체적으로는 공자와 맹자의 유학(儒學/ Confucianism)이 본류인데, 그 정통에서 새롭게 정리한 것이 소위 주자학(朱子學)이라는 신정통주의이다. 11세기에 송(宋)나라 때 주희(朱熹)가 공자의 유학을 재정립한 것이니, 일컬어 신정통주의 유학이라고 한다. 우리 조선의 유학은 대개 주자학적 유학(儒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의 우탁(禹倬)으로부터 주자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우리나라에는 그 주자학이 주종(主宗)을 이루어왔고, 퇴계(退溪 李滉)를 중심한 영남 학파와 율곡(栗谷 李珥)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 학파(畿湖學派)가 공히 신-정통 유학인 주자학인 것이다. 영남이 남인(南人) 계열이라면 기호(畿湖)는 서인(西人) 계열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돈암서원의 사계와 신독재 부자도 서인 계열의 석학(碩學)이다.

나는 어제 네 명의 팀으로 한 번 보고 싶었던 돈암서원과 명재(明齋 尹拯) 고택을 견학하였다. 연산(連山)에 돈암(遯巖)이란 바위가 있었고 거기서 사계가 물러나 머물면서 이름이 되었으니, 달아날 둔(遯)자는 은둔(隱遁)과 둔거(遁居), 둔적(遁迹)의 의미로 사계가 채택했는데 본래 돈(遯)의 발음이어서 돈암서원이라 부른다. 처음에 지은 자리가 낮아서 수해를 입을까 하여 1880년 조금 높은 곳의 현재 위치에 옮겨 지은 것이다. 이는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에도 제외되어서 지금까지 전해올 수 있을 만큼 비중이 큰 서원이었는데, 2019년에 다른 서원 9군데와 함께 한국의 서원(書院)들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서 훨씬 의미의 무게를 더하여 기호 학맥의 수장(首長)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몇 주전 우리 같은 팀이 함께 갔던 영남의 도산과 병산서원을 떠올리니 공간이 넉넉한 평지의 돈암은 사뭇 여유로웠다. 신독재는 이 푸근한 응도당(凝道堂)에 반듯하게 앉아 홀로 있어도 삼가며 공손한 자세로 예학과 도(道)의 생각들을 응집(凝集)하지 않았겠는가. 왜 둔(遯)을 여기선 돈암(遯巖)이라 읽는 가를 얘기하면서, 우리는 응도당에 걸터앉아 해설사와 같이 근 400년 전의 사계와 신독재 부자를 이야기했다.

뻐꾸기 우는 맑은 날씨의 명재 고택은 열린 앞 들에 어웋러 평화롭기 이를 데 없는 고요한 정취일 뿐이었다. 인조 반정(仁祖反正)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西人)들이 강경한 입지의 송시열 계와 온건한 그의 제자 윤증(尹拯) 계열의 회니논쟁(懷尼論爭)에서 격론의 그 역사 분위기를 상상하면서 내가 왔는데. 조선 시대 당쟁의 열기는 다 식고 살구가 굵어가는 5월에 젊은 충청도 해설사의 설명조차 느릿느릿 평온하기만 했다, 당시에는 서인들의 노론과 소론이 심각했었지만. 지금은 다 역사의 뒤 안에 묻혔을 뿐인데, 노령에 사약을 받았던 333년 전 우암도 갔고, 우의정까지 제수 했으나 사양하며 진사(進士)로만 살았다는 명제(明齋 尹拯/ 1629-1714))의 고택(故宅)도 이리 평온한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