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니 논쟁/ 尤庵과 明齋
개인적 감정 대립의 발단으로 서인(西人) 간의 30년 논쟁인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우리 역사의 당쟁의 일부가 되었다. 사제 간(師弟間)에 또 동문 간(同門間)에 얽힌 편파가 부추겨 조정에 고발까지 했고, 끝내는 숙종이 처분을 내렸으니, 송시열을 두둔하고 윤증은 율곡(栗谷)이 불교로 입산(入山)한 과오를 언급하였다 하여 벌칙으로 윤증을 유가의 현인(賢人)으로 치지 말라고 함으로 일단락되었던 사건이었다. 송시열과 윤증(尹拯)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는 사계(沙溪 金長生)의 문인으로 동창생이었는 데, 현종(顯宗) 때 예송(禮訟) 논쟁으로 둘이 불화한 것이 기화로 우암이 윤선거를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죽지 않았다며 비난했고, 윤선거가 죽은 뒤 아들 윤증이 스승인 우암에게 아버지 묘비 문을 청했을 때 윤선거에 대한 감정으로 비문에 그런 표현을 넣었으며 아들 윤증이 스승에게 비문의 수정을 요청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설킨 감정이 마침내 윤증이 스승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고, 박세채(朴世采)의 만류로 보내지는 않았다는 데 박세채의 사위였던 송시열의 아들이 그것을 알고 아버지에게 알려주어서 아주 금이 가고 말았던 것이다.
‘회니 본말(懷尼本末)’이란 책이 나왔을 정도로 관심사였으니 1681-1685년 사이에 그 둘이 주고받은 편지와 상소(上疏文), 경연(經筵)의 설화, 유생들의 통문(通文)과 같은 글을 한데 모은 내용이다. 서인 계열에서는 회니시비가 큰 관심사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스승과 제자의 논쟁이라 사생(師生)의 논변(論辨), 회니시비(懷尼是非)라는 명제로 숙종(肅宗), 경종(景宗), 영조(英祖), 정조(正祖)까지 어전에서 토의했을 정도였음을 조선왕조실록에서 볼 수 있다. 명재는 스승 우암 보다 22살 연하여서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동창인 송시열의 제자가 되었는데, 아버지의 비문으로 감정이 일어나서 윤증은 스승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우암의 학문은 기질의 편박(偏薄) 때문에 주자학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고, 그의 북벌 의리도 실적도 없는 허명(虛名)만이며 의(義)와 이(利)를 같이 잡으려는 의리쌍행(義利雙行)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서인(西人)이 집권했을 때에 남인(南人)을 처벌하면서 서인들 자체 내의 강경한 사람들과 온건한 태도가 심화되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것이라는 정치적 해석이 있지만 소론(少論)의 영수(領袖)가 된 윤증(尹拯)과 스승 송시열(宋時烈)과의 감정 대립에서 경쟁 관계로 치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논어의 공자가 언급한 회덕(懷德)이 군자는 선을 즐거워하고 소인은 평안을 구한다는 데서 나온 송시열의 고향인데 선을 추구하고 인(仁)을 실행하며 공익(公益)을 앞세우는 군자의 땅에서 소인들이나 하는 분쟁으로 제자와 싸웠고, 공자(孔子)의 마을이라는 뜻인 이산(尼山), 이성(尼城)이 윤증의 고향이건만 공자가 말한 덕을 실행함보다 이익이나 명예에 기울었다고 비판하였던 것이 회니시비의 근원이었다. 실상 부끄러운 한 유가(儒家)의 얼룩이었으니, 그들에게도 까닭이야 왜 없었겠는가 마는, 이젠 그렇게 역사에 접어두고 더 이상 사감(私憾)이 대의(大義)와 공의(公義)에 얼룩지지 않도록 대범하게 넘겨야 할 것이다.
개인적 감정 대립의 발단으로 서인(西人) 간의 30년 논쟁인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우리 역사의 당쟁의 일부가 되었다. 사제 간(師弟間)에 또 동문 간(同門間)에 얽힌 편파가 부추겨 조정에 고발까지 했고, 끝내는 숙종이 처분을 내렸으니, 송시열을 두둔하고 윤증은 율곡(栗谷)이 불교로 입산(入山)한 과오를 언급하였다 하여 벌칙으로 윤증을 유가의 현인(賢人)으로 치지 말라고 함으로 일단락되었던 사건이었다. 송시열과 윤증(尹拯)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는 사계(沙溪 金長生)의 문인으로 동창생이었는 데, 현종(顯宗) 때 예송(禮訟) 논쟁으로 둘이 불화한 것이 기화로 우암이 윤선거를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죽지 않았다며 비난했고, 윤선거가 죽은 뒤 아들 윤증이 스승인 우암에게 아버지 묘비 문을 청했을 때 윤선거에 대한 감정으로 비문에 그런 표현을 넣었으며 아들 윤증이 스승에게 비문의 수정을 요청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설킨 감정이 마침내 윤증이 스승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고, 박세채(朴世采)의 만류로 보내지는 않았다는 데 박세채의 사위였던 송시열의 아들이 그것을 알고 아버지에게 알려주어서 아주 금이 가고 말았던 것이다.
‘회니 본말(懷尼本末)’이란 책이 나왔을 정도로 관심사였으니 1681-1685년 사이에 그 둘이 주고받은 편지와 상소(上疏文), 경연(經筵)의 설화, 유생들의 통문(通文)과 같은 글을 한데 모은 내용이다. 서인 계열에서는 회니시비가 큰 관심사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스승과 제자의 논쟁이라 사생(師生)의 논변(論辨), 회니시비(懷尼是非)라는 명제로 숙종(肅宗), 경종(景宗), 영조(英祖), 정조(正祖)까지 어전에서 토의했을 정도였음을 조선왕조실록에서 볼 수 있다. 명재는 스승 우암 보다 22살 연하여서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동창인 송시열의 제자가 되었는데, 아버지의 비문으로 감정이 일어나서 윤증은 스승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우암의 학문은 기질의 편박(偏薄) 때문에 주자학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고, 그의 북벌 의리도 실적도 없는 허명(虛名)만이며 의(義)와 이(利)를 같이 잡으려는 의리쌍행(義利雙行)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서인(西人)이 집권했을 때에 남인(南人)을 처벌하면서 서인들 자체 내의 강경한 사람들과 온건한 태도가 심화되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것이라는 정치적 해석이 있지만 소론(少論)의 영수(領袖)가 된 윤증(尹拯)과 스승 송시열(宋時烈)과의 감정 대립에서 경쟁 관계로 치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논어의 공자가 언급한 회덕(懷德)이 군자는 선을 즐거워하고 소인은 평안을 구한다는 데서 나온 송시열의 고향인데 선을 추구하고 인(仁)을 실행하며 공익(公益)을 앞세우는 군자의 땅에서 소인들이나 하는 분쟁으로 제자와 싸웠고, 공자(孔子)의 마을이라는 뜻인 이산(尼山), 이성(尼城)이 윤증의 고향이건만 공자가 말한 덕을 실행함보다 이익이나 명예에 기울었다고 비판하였던 것이 회니시비의 근원이었다. 실상 부끄러운 한 유가(儒家)의 얼룩이었으니, 그들에게도 까닭이야 왜 없었겠는가 마는, 이젠 그렇게 역사에 접어두고 더 이상 사감(私憾)이 대의(大義)와 공의(公義)에 얼룩지지 않도록 대범하게 넘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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